마음의 명詩

들길에 서서

소담이2 2006. 1. 21. 03:42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신석정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는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 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마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 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 오던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 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

신석정 (辛夕汀 1907∼1974)

시인. 본명은 석정(錫正). 아호는 석정(夕汀·釋靜·石汀). 전라북도 부안(扶安) 출생.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향리에서 한문을 공부함 1930년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1년 불전을 연구, 54년 전주고등학교, 55년 전북대학교, 61년 김제등학교, 63∼72년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1967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지부장.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 31년 《시문학》지 <선물>, 《문학》지 <너는 비둘기를 부러워하더구나> 등을 발표. 주로 농촌에 살면서 자연에 귀의하려는 시상을 계속 추구했던 점에서 목가적 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68년 한국문학상을 받음. 대표작으로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슬픈 구도》 《임께서 부르시면》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 시집으로 《촛불(1939)》 《슬픈 목가(1947)》 《빙하(1956)》

시낭송회에서 자주 읊어지는 詩들이다. 남자 중학생이 때로는 조심스럽고, 때로는 조용하게 시어들을 낭송한다. 과외공부도 벗어나고 께임도 놓아두고 하는 시낭송의 묘미는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양식이요, 기쁨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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