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서정주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화사(花蛇) 서정주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귀촉도(歸蜀途) 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銀河)ㅅ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신 부 서정주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거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자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거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서정주 徐廷柱 [1915
~ 2000]
본관 : 달성 호 : 미당 출생지 : 전북 고창 주요수상 : 대한민국 문학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5·16민족상, 자유문학상, 금관문화훈장 주요저서 : 시집 《화사집》(1941), 《신라초》(1960), 《질마재 신화》(1975),
《한국의 현대시》《시문학원론》 주요작품 : 시 《화사》《자화상》《귀촉도》《국화 옆에서》《동천》《추천사》《춘향유문》
'고운
눈썹'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비유로 시인의 첫사랑인 그녀의 표현이라고 들었다. 마을의 처녀는 눈섭이 매우 검고, 얼굴이 달덩이 같았으며
매우 조신한 처녀 였다고 한다. 말한마디 붙여 볼수 없었으나 마주치는 길목에서 한번씩 가슴설레던 시절,시인의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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