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 정호승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장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내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그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벋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형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종 이
학 정호승
종이학이 날아간다 지리산으로 날아간다
비가 오면 종이는 슬쩍 남겨두고 날아간다
봄비 그친 뒤 지리산으로 가보라
지리산 능선 위에 학이 앉아 웃고 있다
결혼에
대하여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국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소톱을 다정스레 깍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정 호 승 [1950 ~ ]
1950년 경남 하동
출생, 대구에서 성장. 대구 계성중·대륜고 졸업.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 당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 당선. 1979년 첫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간행.
1982년 시집 『서울의 예수』 간행. 1987년 시집 『새벽 편지』 간행. 19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7년 제10회 동서문학상 수상 1990년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 간행. 1991년 시선집 『흔들리지 않는 갈대』 간행.
1997년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간행.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와 장편동화 『에밀레종의 슬픔』, 동화집 『바다로
날아간 까치』 간행.
시상이 떠오를 때나 느낌이 올때는 메모를 하여서 수북이 책상 설합에 모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시를 쓴다는
시인의 이야기가 뇌리에 남는다. 메모를 하기는 해도 잘 모으기도 어렵고 그흔한 녹음기를 들이 대면 가지고 있던 생각과 시상도 날라가 버린다.
나이가 들면 글을 쓰는 능력도 줄어드나 보다. 예전에 쓴글 만큼의 표현도 못하는것
같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