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ak Park 와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시카고의 늦가을. 오늘은 서쪽 10마일 지점의 오크파크(Oak Park)를 찾았다. 오래전부터 시카고의 교외 고급 주택지로서 자리잡은 이곳에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t Hemingway
1899-1961)의 생가와 박물관이 있다.
헤밍웨이의 유아기 및 소년기 흔적이 그대로 남은 오크파크 주민들은 위대한 소설가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헤밍웨이가 이 고장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소도시 다운타운 입구에 들어서면 <방문객 안내소> 가 있다. 온통 헤밍웨이 기록물로 장식되어 헤밍웨이의 소박물관 같은 인상을 준다. (아래 사진)
방문객 안내소를 나서면 도보로 5분거리에 그의 생가가 있다.(아래 사진)
고풍스러운 3층 집. 지금은 1층과 2층만이 공개되고 있다. 낚시와 사냥을 좋아하는
의사인 아버지와 음악·그림에 뛰어난 어머니에게서 기질과 재능을 그가 이어 받았다는
흔적이 이 생가의 이곳저곳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오크파크 에비뉴 339 N의 생가는 빅토리아 풍의 전통과 품위가 넘쳤다.,
80에 가까운 그로스 여사는 1층서부터 2층까지 나그네의 지적호기심을 자극케 하는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어네스트가 태어난 2층 방의 침대(위 사진).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 날 다양한 문학
축제를 펼쳤는데, 특히 그 날 오전 8시 생가에서 트럼 펫소리가 울려퍼졌다. 의사였던
그의 부친이 100년전 그날, 그 시각, 그곳에서 득남의 기쁨에 겨워 트럼펫을 불었기
때문이라 함.
1층 식당의 무쇠로 된 큰 오븐(위 사진의 오른쪽)이 눈에 뜨였다.
생가를 나와 오른 쪽으로 2브락 가면 오크파크 에비뉴 200 N에 <헤밍웨이 박물관>
육중한 대리석 기둥과 계단으로 이루어진
건 물은 이곳이 예전에 무슨 종교적인
건물 로 사용된듯함.
1층
입구를 지나면 역시 80 가까운 자원봉사 할머니(아래 사진)가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티킷을
판매하거나 각종 상담에 응해주었다. 약 100여평
되는 공간엔 그의 유아기부터 밀 기까지의 전 생애를 유품이나 각종 모형 및 사진으로
재현. 사실 헤밍웨이의
박물관은 오크파크 보담 그가
작가로 명성을 날릴 당시에 10년간 거 주 했던 미국 프로리다 주의 키웨스트 (Key
West) 박물관이
규모나 시설면에서 1층 구석에 헤밍웨이가 사용했던 타자기와 같은
모델의 타자기가 있다. 이것은 오크파 크의 Austine Byusiness Machines
Gene Luchetti라는 기기회사에서 기증한 것으로 방문객들이 마음대로 타이핑을 해
볼수 있다. 유리관 속에 밀패된 헤밍웨이 타자기와
구식 사진기가 보임. 헤밍웨이의 아프리카 체험을 소개한
자료. 그리고 그의 작품과 영화화에 관한 자료.
그가 졸업한 오크파크 고등학교 건물과 입구
화단에 설치된 헤밍웨이 기념판. 이곳 상 공회의소에서 노벨문학상(1954년) 수상을 기념하는 동판을 만들어 세운
것, 생가 및 박물관을 둘러본 뒤 이곳
저곳 동네를 걸어보니 고풍스러운 각종 저택들이 잘 보존되고 있음을
알게됨. '오크파크"! 즉, 떡갈나무 동네에 걸맞게 동네
이곳저곳은 온통 떡갈나무 낙엽뿐.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The Syun Also
Rises 1926)로 명성을 얻은 그는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로 작가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에스파냐 내전을 소재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하였다. 1952년
대어(大魚)를 낚기 위한 늙은 어부의 고독한 싸움을 그린 《노인과 바다》로 큰 호평을 받아, 이
작품으로 1953년 퓰리처상,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4번의
이혼, 불행한 결혼생활과 그에 따르는 신경쇠약으로 몇 차례 자살을 기도하다 1961년 엽총으로 자살 하였다. 그는 문명의 세계를 속임수로 보았고 삶을 고통스럽고 복잡한 것으로 파악하였으나, 대표작 《노인과 바다》에서 삶이 비록 패배하는 싸움일지라도 그 패배가 갖는 존엄성과 그 자체로 승리인
삶이라는 사상을 지닌 작가였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떡갈나무 동네'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