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의 ... 몽유 도원도 삶의 버릇처럼 박물관에 자주간다. 신비롭고 정성스런 유물이나 역사를 전 하는 유물과의 대화를 하기 위함이다. 무거운 가방은 사물함에 맏기고 특별전이나 기획전을보고 한국화 회화실로 향한다. 우리 선현들은 모두 시인묵객 이였기에 때로는 역동적이고 때로는 여백의 미를 한껏 살려서 중후하고 웅장하며 빈 공간까지도 그림이 있는듯 보이는 그림들을 보기 위함이다. 그러고 지금은 우리의 곁에 없는 그림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십여년전 1986년 박물관의 노력으로 일본 나라현 천리대학 중앙 도서관에 있는 안견의 몽유 도원도를 본 일이 있다. 누우런 긴종이에 희미한 그림 [ 멀리서 보았기에 가로 38.3cm 세로 106.5cm] 앞에 수많은 사람들과 그 림의 보호를 위해서 안내원을 배치하고 사진은 못찍게 하지만 가까이 갈 수 없도록 했기에 신비하고 귀한 그림을 자세히 볼수 없었다. 무척이나 아쉬웠고 우리나라 국보급 유물을 수탈해간 일본인들이 매우 야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까운 생각도 들었다. 또 어느문인도 찾아와야 된다 는 운동도 했다. 나중에 설명에서 안 일이지만 그때 일본으로 팔리기전 박물관에다 구입요 청을 했으나 너무 고가 [일년예산에 맞먹는 ] 여서 결국 일본인들손에 넘 겨졌다는 이야기를 보니 유물로 한몫을 챙긴 치졸함에 분노도 생겼다. 그때의 그 그림이 우리옛 그림의 아름다움 이라는 책에 실려서 나왔기 에 자세히 볼수도 있고 나의 손으로 재현해 보리라는 욕심이 있어서 그 대로 복사하여 영인본을 그리기로 했다. 그림을 자세히 보니 도원으로 가는길은 현실의 도원에서 뿌우연 안개속을 지나 웅장한 산속 동굴을 지나고 물소리도 들릴듯한 계곡의끝 자락을 지나 이중 폭포가 있는 산 모퉁이를 돌아서 이상향의 도원으로 들어갔으나 속세에서 인간을 싣고 갈 배한척이 한가로히 떠있다는데 배는 않보이고 도원의 복숭아 꽃이 반말해 있는 거대한 동굴끝에 대나무 휘둘린 집 3채가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사람도 없다. 세종 29년 정묘년 서기 1447년 안평대군이 만 29세일때 4월 20일날 꿈꾸 었던 꿈에 도원경을 그리게해서 사흘동안 그려서 완성한 작품이라 한다. 꿈에 산관야복 [산야에사는 사람의 소박한 차림새] 을 입은 노인 이야기도 나오고 자신이 박팽년과 같이 갔다는 이야기, 도원에서 최항 신숙주를 만 났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사람은 일체 않나온다.안평대군이 꿈에본 그대 로 그렸던 것이다. 대군 자신도 꿈에 본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한다. 그림속에 기암괴봉이 화면전체를 덮다 시피하고 그사이사이로 평지 의 길과 복숭아꽃, 폭포등이 아주 온화하고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림을 복사하며 설명을 봐도 도원에 배 한척이 떠있다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어서 묻고 또물어 보았으나 모두 모른다는 대답 뿐이였다 그러나 한국에도 몽유 도원도 만 크게 찍어놓고 설명이 있는 책이 나왔는데 지금도 구할수 있는지 알아보라는 출판사 사장님의 권유로 소개받은 출판사에 문의 해보니 품절이 되었으나 남아있는 책중에서 찾아 보겠노라는 이야기를 듣고 신청을 하여 소장번호 2327번째로 한정판을 구입할수 있었다. A3지 정도의 큰 책이라서 자세히 그림들을 들여다보니 비단에 그린 도원중 간에 가느다란 배 한척이 한가로히 떠 있다. 계곡의 물은 힘찬 모습으로 흘 러내리고 있고 용을 닮은 기암산은 하늘을 향하고 인간세상 [속세] 에도 복 숭아 밭이 있는데 복숭아 나무들을 따라서 산을 휘돌아 도원으로 향하는 길 은 끝임없이 끈어 질듯하다가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있다. 또 폭포수아래 복숭아꽃사이로 선녀가 거닐듯도 하고 꿈속의 도원에 그대로 살아서 환히 핀 송이송이꽃들이 아름답다. 밑그림을 여러개 복사를 하고 고증을 확인하고 했으나 몽유 도원도의 그림 완성은 아직 못했다 좀더 시간을 두고 찬찬히 잘그려 보리라는 욕심 때문이 기도 하고 아직은 좋은 그림이 되게 그릴 자신이 없다. 화가 안견의 필치에 가까이는 못가도 비슷하게는 그려야 겠다는 부담이 크기에 그림을 빨리 완성 못하는게 아닌가한다. 앞으로 정진하여 좋은 그림을 그리려는 노력 중이다. 요즈음도 시간만 되면 가끔 몽유 도원도 그림을 펼쳐놓고 끝임없이 화가 안견 선생님의 섬세하고 웅장한 그림과 그림을 칭송한 찬시들을 감상한다. 안평대군 서시 이세상 어느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은자들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을시고 천년을 이대로 전하여 봄직하지 않은가 그림이다된 후 사흘째 정월 밤. 치지정에서 마침 종이가 있어 한마디적어 밝은 정취를 기리노라 [그림완성 3년후 1450년 정월 어느밤에 쓴 시문] 안평대군 [1418년 9월19일 탄생 ~ 1453년 수양대군에 의해 강화도 교동 유배지 에서 사사됨 세종대왕과 소현왕후 사이에 태어난 8왕자중 3째] [소현왕후 태생왕자: 문종 세조 안평대군 림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10세 ~ 안평대군에 봉해 졌음 11세 ~ 좌부대언 정연의 딸과 결혼 12세 ~ 성균관에 입학 [학문의 성장기에 큰계기가 됨] 19세 ~ 250결의 땅을 받음 [여기서 나오는 재원으로 문화 예술분야 활동이 가능함 20세 ~ 함경도에 설치된 진 에서 야인들도 토벌함 세종대왕 붕어후 훈구대신 황인보 김종서 이현노의 도움을 받아 정치적으로 실력을 기름 형인 수양대군과 첨예한 세력다툼을 전개 하다가 1453년 정유 재란을 맞아 강화도에 유배됨 문종 안평대군 --> 글씨를 잘썼음 안평대군 영응대군 --> 그림과 음악에 뛰어 났음 안견 세종조 [직위 1418 ~ 1450] 문종 [직위 1450 ~ 1452] 단종 [직위 1452 ~ 1455] 세조 [직위 1455 ~ 1468] 예종 [직위 1468 ~ 1494]의 초년까지 여러 왕의 치세를 거치며 오랫동안 살았음 화가로써 가장 화려한 영예를 크게 누리며 황동했던 시기는 세종조 때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