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명詩

사평역에서

소담이2 2005. 10. 13. 01:55

 

 

사평역에서(창비시선 40)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 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희망을 위하여
곽재구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은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
너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네 등 위에 내려 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너를 포근하게
감싸 껴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 더욱
편안하게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일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잠들지 않으리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질러오는
한세상의 슬픔을 보리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이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어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은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


겨울의 춤
곽재구

첫눈이 오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

지난 겨울 쌓인 허무와 슬픔
먼지처럼 훌훌 털어 내고
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
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

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튼을 걷어 내고
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 두어야겠다.

그리고...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
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
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
끌어 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 ...

곽재구

출생 전남 광주
학력 전남대 국문과 졸업
등단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시단에 등단. 1983년 '사평역에서', 1985년 '전장포 아리랑', 1986년 '한국의 연인들'그리고 '서울 세노야'

걸죽한 목소리로 낭송한 사평역에서는 들으면 들을 수록 구수한 된장 냄세가 난다. 어느 친구의 선물로 받아온 cd 에는 시 낭송이 있어서 가끔 듣기도하고 틀어 놓고 일을 하면서 분위기를 가라 앉히기도 한다. 지금도 사평역에서는 아직도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영상을 느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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