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27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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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필과 서화 소개
<친필> <앙간비금도> 1)<양간 비금도 소개> (2002. 3. 18. 문온공파 영환 조사. 소개) * 22.2x12.0cm * 종이에 채색 * 허엽의 12대 종손 소장 . "허난설헌의 「양간비금도」는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소녀가 그림 속의 인물로 등장하는 첫 그림으로 보여진다. 임란 전 조선중기까지의 그림이 중국의 고사인물도나 우리의 산수가 아닌 화보풍의 산수를 그린 데 비해 허난설헌의 「앙간비금도」는 주변의 실경이 등장하는 경우로 조선후기 진경산수와 풍속화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출처: '한국여류한시문선', 김지용, 대양서적, 1973.) 이 기슭에 행여나 배 저을세라
<아들딸 여의고서 >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소지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알고 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놀테지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한들 이 또한 잘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許米子 번역하고 鄭良婉 쓰다 1985年 11月 24日
2)뒷면의 시 꿈에 광상산에 오르다 푸른 바다가 요지에 잠겨들고 파란 난새는 아롱진 난새에 어울렸어요. 스물이라 일곱송이 부용꽃은 붉은 빛 다 가신 채 서리 찬 달 아래에...
5. <허난설헌 생가 탐방> (2002. 5. 23. 항용(제) 현지 탐방 촬영 제공)
<우물> <담장>
<안채> <안채 앞 화단>
<사랑채> <안채 뒤 화단>
*<허난설헌 생가>관련 문화재청 해설 자료 소개 (2002. 4. 10. 주회(안) 제공)
연보
1세(1563, 명종18년) : 허난설헌은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1711년 :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하여 『난설헌집』이 간행되었다.
비단띠 비단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3) 哭子歌(곡자가)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여필종부(女必從夫)와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엄격한 사회제도에 묶여 여인네는 '오직 술이나 음식을 의논할 뿐이며, 옷이나 바느질하고 물이나 길으며 절구질이나 잘 하면 넉넉하다'고 여겨질 따름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지 못했던 시절에 주옥 같은 글로써 삶을 노래하고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 있다.
서애 유성룡으로 하여금 말을 세우고 뜻을 창조함이 허고의 꽃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이 빛나 눈여겨 볼 수가 없고, 소리가 울리는 것은 빼어난 옥구슬이 서로 부딪힘이요, 남달리 뛰어나기는 숭산과 화산이 빼어나기를 다투는 듯하다. ... ... 사물을 보고 정감을 일으키며 시절을 염려하고 풍속을 민망케 함에 있어서는 열사(烈士)의 기풍이 있다
4)난설헌의 문학세계 평론
한가지도 세상에 물든 자국이 없으니... 하며 감탄을 숨기지 못하게 했던 여인. 스물일곱 해의 짧은 삶을 마감하고 2백수 남짓한 한시를 남겨 조선 시대의 가장 빛나는 여류시인으로 손꼽히는 난설헌은, 경상감사와 부제학을 지낸 학자 허엽의 딸로 강릉에서 태어났다.
성과 봉의 두 오빠를 위로 하고, 홍길동전을 지은 균을 아우로 둔 난설헌은 조상적부터 문학이 뛰어 났던 허씨 집안에서 재주 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글배우기를 즐겨서 여러 스승을 찾아 다녔던 허엽은 자기의 글 배울 적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자주 들려주었고, 여성들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시대에 오빠 봉은 난설헌을 자신의 글벗인 이달등에게 나아가 시를 배우게 해 주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면서 난설헌은 일찍이 남다른 글재주를 보였다.
그녀는 이미 여덟 살이던 해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이란 장시를 써서 많은 이로부터 시재를 인정 받았다.
반면에 난설헌은 평범한 가정주부로만 만족할 수는 없는 뛰어난 재주와 기품을 지닌 여성이었다. 비범한 아내에 대한 열등감에서인지, 남편 김성립은 집에 있는 날보다 기생과 함께 노는 날이 더 많았다. 공부하러 간다는 핑계하고 날마다 첩의 집에서만 노는 남편에게 난설헌은 옛날의 첩은 재주가 있었건만, 오늘의 첩은 재주가 없더라라는 뜻깊은 편지를 써보내 그를 꾸짖어 보기도 했다.
그녀가 남긴 내방가사의 걸작 "규원가"는 남편과의 불화와 그로 인한 고독을 빚어낸, 눈물과 인종(忍從)으로 살아가는 한 여인의 처절한 심경토로의 산물이다.
거기서 난설헌은 '부생모육(父生母育) 신고(娠苦)하여 이내 몸 길러낼 제, 공후배필 못 바라도 군자호구 원하더니, 삼생(三生)의 원업(怨業)이요 월하의 연분으로, 장안유협 경박자를 꿈같이 만났으니, 상시의 마음쓰기 살얼음을 디디는 듯, ...... 간장이 구곡되어 구비구비 끊겼어라. 차라리 잠을 들어 꿈에나 보려하니, 바람에 지는 잎과 풀속에 우는 짐승, 무슨 일 원수가 되어 잠조차 깨우는고, ......'
하고 잠 못들며 비통해 하다가 '세상의 설운 사람 수없다 하려니와, 박명한 홍안이야 날같은 이 또 있을까, 아마도 이 님의 탓으로 살동살동 하여라'고 끝내 통곡하는 것이다.
남편으로 향하는 애정까지 보태어 키웠던 아들과 딸이 다 크지도 못한 채 차례로 떠나는가 했더니, 평화로웠던 친정도 옥사에 휘말려 오빠 봉과 아우 균이 이리저리 귀양길에 올랐다. 난설헌에게 닥친 안팎의 슬픔은 그녀를 더욱 외롭게 했다. 다정다감한 그녀는 오로지 시로써 고달픈 심정을 가누어야 했다. 스물 세살이던 해에 난설헌은 어머니의 상을 당해 친정에 잠시 머물렀다.
구름을 따라 날던 한떨기 붉은 꽃이 아래로 떨어지는 모양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난 난설헌은 문득 시 한 수를 지었다.
뒷날 불길을 피한 그녀의 작품 일부가 동생 허균을 통해 중국과 일본에 소개되어 격찬을 받았다. 허난설헌은 경기도 광주군의 야트막한 한 동산에 그녀의 두 아이의 무덤을 바라보고 묻혔다. 죽은 지 400여년이 지난 뒤에 세워진 그녀의 묘비는 '굴종만이 강요된 질곡의 생활에 숨막혀 자취도 없이 왔다가 간 이 땅의 여성들 틈에서도 부인은 정녕 우뚝하게 섰다' 는 글귀가 그녀를 애잔히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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