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명詩

허란설헌

소담이2 2008. 2. 22. 22:37
허란설헌, 친필, 작품, 

2007/12/27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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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블로그 > 푸른산
원본 http://blog.naver.com/jjc4012/90001827452
허란설헌, 친필, 작품, 오페라.. 등( 허란설헌 시리즈_2) | 시. 시인과 문학 2006/01/05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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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필과 서화 소개

   

   

                       <친필>                                           <앙간비금도>

    1)<양간 비금도 소개> (2002. 3. 18. 문온공파 영환 조사. 소개)

    * 22.2x12.0cm     * 종이에 채색   * 허엽의 12대 종손 소장 .

 "허난설헌의 「양간비금도」는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소녀가 그림 속의 인물로 등장하는 첫 그림으로 보여진다. 임란 전 조선중기까지의 그림이 중국의 고사인물도나 우리의 산수가 아닌 화보풍의 산수를 그린 데 비해 허난설헌의 「앙간비금도」는 주변의 실경이 등장하는 경우로 조선후기 진경산수와 풍속화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여성화가에 대한 소고)


 

    2)묵조도와 시문집

         
<묵조도>(2002.3. 18. 영환(문) 제공)               

 (출처: '한국여류한시문선', 김지용, 대양서적, 1973.)
『 기울어진 처마 스쳐 짝지어 제비 날고
낙화는 분분하게 비단옷을 치고 있네
동방 깊은 곳에 임 생각 상한 마음
푸른 강남 가신 님은 돌아오질 아니하네
비단폭을 가위로 결결이 잘라 겨울 옷 짓노라면 손끝 시리다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저음은
등잔불도 돋울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
호수 가 달이 뜨서 밝아오며 연 캐는
아가씨들 밤중에야 돌아가네

이 기슭에 행여나 배 저을세라
한쌍의 원앙들이 놀랄까 두렵구나. 』

 


  

     

 

 

  <아들딸 여의고서 >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소지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알고 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놀테지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한들 이 또한 잘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許米子 번역하고 鄭良婉 쓰다 1985年 11月 24日

 

  2)뒷면의 시

   꿈에 광상산에 오르다

   푸른 바다가 요지에 잠겨들고

   파란 난새는 아롱진 난새에 어울렸어요.

   스물이라 일곱송이 부용꽃은

   붉은 빛 다 가신 채 서리 찬 달 아래에...

     

 

   

 5. <허난설헌 생가 탐방> (2002. 5. 23. 항용(제) 현지 탐방 촬영 제공)

  

                  <우물>                                                             <담장>

 <안채>                                                     <안채 앞 화단>

            <사랑채>                                                            <안채 뒤 화단>

 

*<허난설헌 생가>관련 문화재청 해설 자료 소개 (2002. 4. 10. 주회(안) 제공)

종 목 : 문화재자료 59호      명 칭 : 강릉이광노가옥 (江陵李光魯家屋)   분 류 : 고가   수 량 : 1동    지정일 : 1985.01.17    소재지 : 강원 강릉시 초당동 475-3 .  소유자 : 이광노   관리자 : 이광노

조선 선조 때 문신인 허엽(1517∼1580)이 살던 집으로 지은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곳은 허엽의 딸이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허난설헌(1563∼1589)이 태어난 곳으로 전한다.

행랑채의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마당을 거치면 ㅁ자형의 본채가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하고 그 사이에는 광을 배치하였다. 안채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부엌과 방, 마루로 되어 있는데 건물 앞·뒤로도 칸을 구분한 겹집 형태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솟을대문과 협문을 두고 공간을 구획하여 독립성을 확보하였다. 후원과 사랑마당은 한국 전통의 정원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갖가지 화초와 나무들로 잘 정돈되어 있다.


문화재명 강릉이광노가옥(江陵李光魯家屋)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 허난설헌(1563-1589)이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며,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맞배지붕의 솟을 대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3칸의 광이 있고, 좌측으로는 행랑방과 마구간이 있는 대문간채를 지나면 잘 다듬어진 정원과 함께 사랑채가 나타난다. 팔작기와지붕으로 전면에 툇마루가 있고, 대청 2칸을 우측에 두고 있다.


 사랑채의 좌측 끝은 상 노인방으로 안채 출입문간에서도 출입이 가능하게 하였고, 협문과 공간을 구분하는 담을 전면에 가지고 있다.


사랑 대청은 창호로 둘러싸여 있으며 천장은 연등천정으로 하고 상부의 판대공과 대들보는 툇간만큼 전면으로 돌출되면서 노출 되어 있어 구조적인 미를 풍기고 있다.


 안채는 팔작기와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되어 있다. 부엌, 방 마루로 되어 있으며 부엌의 출입구는 사각으로 연결되어 미닫이문을 내고 있으나 근래에 수리를 한 듯하다.


 안채 방은 두짝 세살문과 용자창호의 이중문으로 구성되고, 마루는 네짝 분합문으로 짜여 있다. 집 주위에 담이 둘러싸여 있으며, 사랑채의 출입은 솟을대문을 통하여 남자들이 주로하며,측면의 협문은 여자들이 안채에 출입할 때 사용하였다.


 이때의 시선 차단을 위하여 출입 통로를 따라 담을 쌓았으며 이러한 것은 공간의 분할을 가져와 전체적으로 폐쇄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으나, 후원과 정면의 마당을 넓게 자리잡아 정원을 아주 잘 꾸미고 있어 차라리 개방감을 주면서 한국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볼 수 있다

 

 

연보

 

1세(1563, 명종18년) : 허난설헌은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8세(1570, 선조3년) :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으며 뒷날 주옥같은 시 213수를 남겼다.


15세(1577, 선조10년) : 난설헌은 이 때 서당 김성립에게 시집간 것으로 보인다.


23세(1585, 선조17년) :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몽유광산산』를 지었다.


27세(1589, 선조21년) : 짧은 나이로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1590년(선조23) : 이 해 11월 남동생 허균이 친정에 흩어져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모으고,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것을 모아서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았다.


1592년(선조25) : 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전쟁중에 싸우다가 죽었다.


1598년(선조31) : 이 해 봄 정유재란때 명나라에서 원정 나온 문인 오명제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보여주다. 이 시가 『조선시선』『열조시선』등에 실렸다.


1606년(선조39년) : 허균은 이 해 3월 27일 중국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모아서 전해주어 『난설헌 집』은 사후 18년 뒤에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1607년(선조40년) : 이 해 4월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였다. 난설헌집의 발문은 태안 피향당에서 지었다.

 

1711년 :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하여 『난설헌집』이 간행되었다.


38세(1606, 선조39년) : 『난설헌집』을 주지번에게 줌. 『난설헌집』은 그녀가 죽고 나서 18년 뒤에 비로소 중국에서 .


1913년 : 이 해 1월 10일 허경란이 난설헌의 시를 읽고 감화받아 자신이 소설헌이라고 칭하며 시를 지은 <소설헌집>이 활자본으로 신해음사에서 출판되었다.



2) 閨怨歌(규원가) 일부


 

비단띠 비단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임 그린 1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어 내어
배꽃은 비에 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연꽃만 들못 위에 맥없이 지고 있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3) 哭子歌(곡자가)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백양나무 숲 쓸쓸한 바람..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번쩍이는데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 지낸다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여필종부(女必從夫)와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엄격한 사회제도에 묶여 여인네는 '오직 술이나 음식을 의논할 뿐이며, 옷이나 바느질하고 물이나 길으며 절구질이나 잘 하면 넉넉하다'고 여겨질 따름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지 못했던 시절에 주옥 같은 글로써 삶을 노래하고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 있다.

 

 서애 유성룡으로 하여금 말을 세우고 뜻을 창조함이 허고의 꽃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이 빛나 눈여겨 볼 수가 없고, 소리가 울리는 것은 빼어난 옥구슬이 서로 부딪힘이요, 남달리 뛰어나기는 숭산과 화산이 빼어나기를 다투는 듯하다. ... ... 사물을 보고 정감을 일으키며 시절을 염려하고 풍속을 민망케 함에 있어서는 열사(烈士)의 기풍이 있다

 

 

4)난설헌의 문학세계 평론

 

한가지도 세상에 물든 자국이 없으니...

하며 감탄을 숨기지 못하게 했던 여인. 스물일곱 해의 짧은 삶을 마감하고 2백수 남짓한 한시를 남겨 조선 시대의 가장 빛나는 여류시인으로 손꼽히는 난설헌은, 경상감사와 부제학을 지낸 학자 허엽의 딸로 강릉에서 태어났다.

 

성과 봉의 두 오빠를 위로 하고, 홍길동전을 지은 균을 아우로 둔 난설헌은 조상적부터 문학이 뛰어 났던 허씨 집안에서 재주 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글배우기를 즐겨서 여러 스승을 찾아 다녔던 허엽은 자기의 글 배울 적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자주 들려주었고, 여성들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시대에 오빠 봉은 난설헌을 자신의 글벗인 이달등에게 나아가 시를 배우게 해 주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면서 난설헌은 일찍이 남다른 글재주를 보였다.

 

그녀는 이미 여덟 살이던 해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이란

장시를 써서 많은 이로부터 시재를 인정 받았다. 


 그녀는 풍부한 정감을 갖고 있으며 이 정감을 곧잘 시로 표현하어 주위의 찬사를 얻곤 �는데, 어여쁜 용모와 재치, 타고난 시재는 십여살의 허난설헌을 신동이라 불리게 했다.


 그러나 난설헌에게도 불행은 왔다. 열네 살 된 해 난설헌은 부모가 정해주는 안동 김씨의 남자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시댁은 5대째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으나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과거 공부를 한다고 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고, 게다가 아내와 시를 주고 받으며 즐거움을 나눌 만한 위인도 못 되었다 한다.

 

반면에 난설헌은 평범한 가정주부로만 만족할 수는 없는 뛰어난 재주와 기품을 지닌 여성이었다. 비범한 아내에 대한 열등감에서인지, 남편 김성립은 집에 있는 날보다 기생과 함께 노는 날이 더 많았다. 공부하러 간다는 핑계하고 날마다 첩의 집에서만 노는 남편에게 난설헌은 옛날의 첩은 재주가 있었건만, 오늘의 첩은 재주가 없더라라는 뜻깊은 편지를 써보내 그를 꾸짖어 보기도 했다.

 

그녀가 남긴 내방가사의 걸작 "규원가"는

남편과의 불화와 그로 인한 고독을 빚어낸, 눈물과 인종(忍從)으로 살아가는 한 여인의 처절한 심경토로의 산물이다.

 

거기서 난설헌은 '부생모육(父生母育) 신고(娠苦)하여 이내 몸 길러낼 제, 공후배필 못 바라도 군자호구 원하더니, 삼생(三生)의 원업(怨業)이요 월하의 연분으로, 장안유협 경박자를 꿈같이 만났으니, 상시의 마음쓰기 살얼음을 디디는 듯, ......

간장이 구곡되어 구비구비 끊겼어라.

차라리 잠을 들어 꿈에나 보려하니, 바람에 지는 잎과 풀속에 우는 짐승, 무슨 일 원수가 되어 잠조차 깨우는고, ......'

 

하고 잠 못들며 비통해 하다가 '세상의 설운 사람 수없다 하려니와, 박명한 홍안이야 날같은 이 또 있을까, 아마도 이 님의 탓으로 살동살동 하여라'고 끝내 통곡하는 것이다.


 난설헌의 비애는 남편의 난봉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남편으로 향하는 애정까지 보태어 키웠던 아들과 딸이 다 크지도 못한 채 차례로 떠나는가 했더니, 평화로웠던 친정도 옥사에 휘말려 오빠 봉과 아우 균이 이리저리 귀양길에 올랐다. 난설헌에게 닥친 안팎의 슬픔은 그녀를 더욱 외롭게 했다. 다정다감한 그녀는 오로지 시로써 고달픈 심정을 가누어야 했다. 스물 세살이던 해에 난설헌은 어머니의 상을 당해 친정에 잠시 머물렀다.


 하룻밤 꿈에 그녀는 신선의 세계에서 노닐다가,

구름을 따라 날던 한떨기 붉은 꽃이 아래로 떨어지는 모양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난 난설헌은 문득 시 한 수를 지었다.


 그중 한구절을 '부용의 꽃 삼구 송이 붉은 채 서리 찬 달 아래 떨어지니'라고 읊으니, '삼구'란 27을 뜻한다. 서리 찬 달 아래 지는 '삼구' 송이 부용꽃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한듯이 그녀는 27해에 세상을 떠났다.


 혼자서 삭이던 많은 한과 원망을 가슴 가득 안은채,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하여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했던 난설헌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쓴 글을 다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뒷날 불길을 피한 그녀의 작품 일부가 동생 허균을 통해 중국과 일본에 소개되어 격찬을 받았다. 허난설헌은 경기도 광주군의 야트막한 한 동산에 그녀의 두 아이의 무덤을 바라보고 묻혔다. 죽은 지 400여년이 지난 뒤에 세워진 그녀의 묘비는 '굴종만이 강요된 질곡의 생활에 숨막혀 자취도 없이 왔다가 간 이 땅의 여성들 틈에서도 부인은 정녕 우뚝하게 섰다' 는 글귀가 그녀를 애잔히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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