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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등단 제도

소담이2 2007. 5. 13. 05:41

 

 

리 나라에서는 '정식 등단'이라는 절차를 밟지 않으면 문인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관습이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출판사의 인정을 받아 단행본을 내면 문인이 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어디로 등단했다는 약력이 없으면 문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등단 절차에 어떤 것이 있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첫째, 문예지나 무크지에 작품을 발표하거나 여러 사람이 참여한 신작시집으로 등단하는 것입니다. 한 시대의 양대 계간지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사회』는 그 지면에 발표하면 그것으로 등단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예를 들지요. 김지하는 1969년에 문예지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김용택은 1982년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로, 장정일은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로 등단했습니다.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한 시인 장영수·김광규·최석하·안수환·서원동·최승자·이성복·김혜순·박남철 등은 등단 지면에 큰 자부심을 가질 정도로 계간지 등단이 70∼80년대에는 주된 흐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동인지로 등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동인지의 전성시대는 뭐니뭐니 해도 1920년대였습니다. 그때의 동인지 『창조』 『백조』 『폐허』 등은 거의 유일한 등단 지면이었습니다. 그런 동인지에는 독자투고란이 있어 간혹 작품을 실어주기도 했습니다. 원산에서 나온 동인지 『응향』으로 등단한 시인 구상은 그 동인지에 실린 작품이 문제가 되어 가족을 두고 단신 월남하게 됩니다.

『개벽』은 1920년 6월, 천도교에서 발행한 월간 교양잡지였으나 문학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훗날 박영희가 편집을 맡으면서 경향문학의 거점이 되었다.
문예지 신인 추천의 효시는 1924년에 창간된 『조선문단』이었습니다. 이 문예지로 최서해·채만식·박화성·안수길 등이 등단했습니다. 『현대문학』은 1955년부터 신인추천제를 실시하여 이제하·황동규·이성부·이승훈·정현종·오세영·오규원 등 우리 문단의 주축을 이룬 문인을 배출했습니다.

3심제였던 것이 재심으로, 재심에서 1심으로 줄어들어 등단의 과정이 점점 짧아진 데 대해 불만스러워한 나이 든 문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50∼70년대에 추천제가 등단 제도의 주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추천위원이 문단의 원로·중견이어서 투철한 사제의식과 철저한 창작지도가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추천제는 스승이 제자를 문단에 내보내는 시스템이므로 문단 파벌 조성에 일조할 수 있고, 아류를 만들 수도 있다는 약점이 있습니다만 상당히 엄격하게 시행되어 별다른 잡음이 없었습니다.

1914년 최남선이 국민 계몽과 교육을 목적으로 창간한 본격 월간 종합지 『청춘』지의 표지
문예지 현상공모의 시초는 1917년 『청춘』지이고, 『개벽』에 의해 정착이 됩니다. 문예지 신인상은 오늘날 거의 모든 문예지가 취하고 있는 등단제도입니다. 『현대문학』도 이미 오래 전에 추천제에서 신인상제로 바꿨고, 계간지·월간지·시전문 월간지 할 것 없이 문예지들은 연 1∼4회 정도 작품을 공모하여 신인을 문단에 내보내고 있습니다.

한용운(1879∼1944)
시집을 출간하여 문단에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1924년에 나온 김동환의 『국경의 밤』과 1926년에 나온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그러했습니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상 수상 시인인 정동주·구광본·이갑수 등은 등단하면서 수상시집을 낸 행복한 경우입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나를 깨우는 우리들 사랑』(정인섭)은 시집 출간으로 등단한 드문 경우입니다.


외국은 거의 다 책 출간으로 등단하며, 유명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고 합니다. 1969년에 32세로 자살한 존 케네디 툴이라는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숱한 출판사에 'A Confederacy of Dunces'라 제목을 붙인 장편소설 원고를 들이밀었지만 끝끝내 책을 낼 수 없어 좌절한 끝에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사후 12년 만에 책은 출간되었고, 1981년에 퓰리처상 소설부문 수상작이 되었으니 아이러니컬한 일이지요?

그리고 신춘문예가 있습니다. 1925년 <동아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이었던 홍명희가 '독자문예'란을 확대, 승격하자고 제안하여 처음 이 제도가 실시되었습니다. 단편소설·신시·가정소설·동극·가극·동요 6개 부분을 공모한 첫해에 동요 부문에만 200편 이상이 응모되었다고 합니다.

신춘문예는 그 파급 효과로 말미암아 『청춘』과 『개벽』 현상문예 공모의 인기를 단숨에 압도했습니다. <동아일보>에 해마다 작품이 쇄도하자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매일신보>가 연이어 신춘문예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신춘문예가 문단 데뷔의 화려한 관문으로 정착된 것은 6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이른바 70년대 작가군에 속하는 황석영·최인호·한수산·조해일·박범신·조세희·윤흥길 등이 다 신춘문예 출신입니다.

지금은 등단제도가 워낙 다양해져 그가 어느 지면으로 나왔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문예지 추천 아니면 신춘문예가 주된 등단 지면이었던 80년대까지만 해도 신춘문예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신춘문예로만 등단하겠다는 문인 지망생이 아주 많았으니까요. 80년대 한때 문단 인구의 30%가 신춘문예 출신이었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작가적 역량을 확실히 인정받은 제도였습니다.

신춘문예의 매력은 여러 가지 등단 경로 중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개경쟁이 주는 떳떳함, 많은 상금, 숱한 선배문인이 이 제도로 문단에 나갔다는 것 등을 들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신춘문예 출신 문인이 문단의 미아가 되는 일이 많아지자 이 제도의 인기는 주춤해졌습니다. 신춘문예 출신 문인의 증발 이유는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수백 수천 편을 단기간에 심사하기 때문에 역량을 확실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문예지에는 발표지면을 얻기가 어렵기에 등단 이후의 성장이 쉽지 않습니다. 후속작품이 당선작에 못 미칠 경우 아주 쉽게 잊혀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문제점을 보완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신춘문예는 보통 12월 10일께에 마감하여 열흘 만에 심사가 완료되는데, 대학은 그때가 시험기간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패배감을 맛보아야 하니까 신문사마다 일자를 달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중앙일보>가 여름에 공모하는 것은 좋은 사례일 것입니다.

신춘문예의 잡음은 요행수를 노리고서 표절하는 경우와, 중복 투고로 당선이 취소되는 경우에 불거져 나옵니다. 단기간에 워낙 많은 작품을 심사하므로 이런 것을 다 점검할 수 없어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심사위원의 장기집권도 그렇지만 한 심사위원이 여러 곳을 심사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두 사람 중 나이 많은 심사위원의 고집이 통하는 것도 신춘문예의 맹점입니다. 신문사에서는 당선자를 절대로, 계속 밀어주지 않습니다. 밀어줄 수가 없습니다. <중앙일보>사에서 『문예중앙』이 나오는 것처럼 신문사에서 문예지를 내는 경우도 있지만 그 문예지 출신자들이 있기 때문에 신문사는 시상식이 끝나면 나 몰라라 하는 것입니다. 등단 제도가 재정비되면 좋겠습니다.

 

한국 예술 위원외의 문학이야기 -> 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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