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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찍는 사진관

소담이2 2007. 5. 5. 03:29

 

 

강소천 동화              -  꿈을 직는 사진관  -

 

I.

따사한 봄볕은 나를 자꾸 밖으로 꾀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어젯밤만 해도, 내일은 일요일이니 어디 나가지 말고, 방에 꾹 틀어박혀 책이라도 읽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정작 조반을 먹고 나니 오늘은 유달리 날씨가 따뜻했습니다.

나는 스케치북과 그림물감을 가지고 뒷산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굉장히 그림을 잘 그리거나, 그림에 취미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빈손으로 가기는 싫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들고 앉아 그 따사한 봄볕에 읽는 것은 한층 더 싱거울 것 같았습니다.
봄을 그리려고 산에 오른 이 서투른 화가는, 좀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는 것보다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그리하여, 내 눈이 맞은편 산허리에 갔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하리만큼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활짝 핀 꽃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살구꽃이 피려면 한 달은 더 있어야 할텐데, 저렇게 연분홍 꽃이 전등이라도 켠 듯이 환히 피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 꽃나무 있는 데로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골짜기를 내려 다시 산으로 기어올라, 그 꽃나무 아래까지 갔습니다.
단숨에 달린 나는 숨이 차서 그만 땅에 주저앉았습니다.
숨을 돌리며 내가 꽃나무를 자세히 바라보았더니, 나무 밑줄기에 이런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 꿈을 찍는 사진관으로 가는 길 - 동쪽으로 5리 ★

나는 그 연분홍 꽃나무에 핀 꽃 같은 건 생각할 사이도 없이, 곧 이 꿈을 찍는 사진관을 찾아 떠났습니다.
동쪽으로 사뭇 좁다란 산길을 걸어가느라니까, 정말 조그만 집 한 채가 보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집 문 앞에 다다랐을 때는 약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집 문 앞엔 또 이런 것이 씌어 있었습니다.

★ 꿈을 찍는 사진관은 여기서 남쪽으로 5리 되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

나는 남쪽을 향해 또 걸었습니다.
지금 온 만큼 가니까, 정말 또 한 채가 보였습니다.
나는 참 잘 왔다고 좋아라 집 문 앞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까보다 좀더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까와 똑같은 글이 문 앞에 붙어 있었습니다.
아니 꼭 한 자만 틀립니다.
그것은 남쪽으로 5리가 아니라, 서쪽으로 5리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나는 조금 주저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만 더 속아 보자 하고 또 서쪽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마침내 나는 꿈을 찍는 사진관을 찾은 것입니다.
이런 산중엔 어울리지 않으리만큼 커다랗고 훌륭한 양옥집이었습니다.
벽과 창문만이 아니라 지붕까지 새하얀 집 - 다만 정문에 커다랗게 써 붙인,「꿈을 찍는 사진관」이라는 일곱 글자만이 파아란 하늘빛이었습니다.

나는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시오? 들어오시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습니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늘빛 파란 가운을 입은 점잖은 신사 한 분이, 하늘빛 파아란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놓으며, 회전 의자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오셨지요?"
"저어 … 여기가 꿈을 찍어주는 사진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찍지요?" 하고, 나는 찍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내게 조그맣고 얄팍한 책 한 권을 주며, 저 쪽 7호실에 가 앉아 소리 내지 말고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7호실을 찾아갔습니다.
1호실 다음엔 3호실, 그 다음이 5호실, 바로 그 다음이 7호실입니다.
어쩌면 사진관이 꼭 여관집과도 같습니까?
나는 그제야 이 집의 방 번호는 모두 홀수만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벽과 천장까지 새하얀 방 -
들어가는 문외에는 들창 하나도 없는 방입니다.
나는 그 방에 앉아, 지금 받은 얄팍한 책을 펴 들었습니다.
불도 안 켠 방이, 왜, 이리 화안한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빛이라곤 들어올 곳이 조금도 없습니다.
9포 활자만큼 작은 하늘빛 글씨가, 어쩌면 그리도 잘 보입니까.

꿈을 찍으시려는 분들에게!
이렇게 멀리서 찾아오신 손님에게 먼저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께서 이 곳까지 찾아온 데는 두 가지 뜻이 있을 줄 압니다.
그 하나는 신기한 것을 즐기는 마음이요,
또 하나는 무척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당신이니 말이지만, 오늘 저 세상 사람들은 오늘의 문명을 자랑해서 '텔레비전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는 이 일에 비하면, 그까짓 게 다 무엇입니까? 문제도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 더우기 6.25 사변을 치루고 난 우리들에겐, 많은 잃은 것 대신에 가진 것은 안타깝게 보고 싶고 그리운 얼굴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중에 우리에게 없지 못할 가장 귀한 것의 하나는 과거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추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 묵은 앨범을 꺼내어 사진 위에 머물러 있는 지난날의 모습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사진이란 다만 추억의 그 어느 한 순간이요, 그 전부는 아닙니다.
정말 아름다운 추억이란 흔히 사진첩 속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불완전한 것이나마 사변으로 인하여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요행히 우리에겐 '꿈'이란 게 있습니다.
이미, 저 세상에 가 버리고 없는 그리운 얼굴들도 꿈에서는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남북으로 갈리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사이라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꿈길에는 38선이 없습니다.
정말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 꿈이란 사람의 마음대로 꿀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이 있어, 꿈에 보려고 애를 써도 뜻대로 잘 안 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잠깐 꿈을 꾸게 된다 해도, 그 꿈이 곧 깨면 한층 더 안타까운 것뿐입니다.
여기에 생각을 둔 나는, 이번 꿈을 찍는 사진기를 하나 발명했습니다.
이는 결코 거리의 사진사들처럼 영업을 목적한 건 아닙니다.
내게는 안타깝게 그리운 아기가 있습니다.
나는 그 아기의 사진까지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이 사진기를 만들게 된 게,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자아,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그럼, 인제 꿈을 찍는 방법을 설명해 드려야죠.
무엇보다 그게 더 궁금하실 테니까요.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방에서 나오는 한 줄기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은 바로 사진기가 놓여 있는 곳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꿈을 꾸기만 하면 그 꿈은 곧 사진기 렌즈에 비치게 됩니다.
꿈이 비치기만 하면, 사진기가 저절로 '쩔꺼덕'하고 사진을 찍어 버리는 것입니다.
필름에 사진이 찍히면 곧 현상하여 손님의 요구대로 크게 또는 작게 인화지(사진종이)에 옮겨 드립니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꿈을 꾸는 일입니다.
어떻게 짧은 시간에 꿈을 꿀 수 있으며, 또 꿈을 꾼다 해도 그게 정말 자기가 사진에 옮기고 싶은 꿈을 꾸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로 내가 제일 오랫동안 연구에 고심을 한 것이 이것입니다.
꿈을 찍는 것쯤은 이것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오래 가졌었고, 무수한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나는 마음대로 꿈을 꿀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실로 이것은 세계적인 아니 세기적인 발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 그럼 당신도 곧 그리운 이를 만나는 꿈을 꾸십시오.
그리운 이의 꿈을 사진 찍어 드릴 테니.
그 방법 - 당신이 있는 방 한구석에 흰 종이와 한 장과 만년필 한 개가 놓여 있습니다.
당신은 그 종이에 그 파란 잉크로 당신이 만나고 싶은 이와 지난날의 추억의 한 토막을 써서, 그걸 가슴속에 넣고 오늘밤을 주무시오.
내일 날이 밝으면, 당신은 지난밤에 본 꿈과 꼭 같은 사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을 겁니다.
한 가지 미안한 것은, 이 곳은 산중이어서 손님들에게 대접할 음식이 준비되어 있지 못합니다.
미안하지만 하룻밤 그냥 주무셔 주십시오.
꿈을 찍는 사진관 아룀.

II.

나는 종이쪽에 이렇게 썼습니다.

살구꽃 활짝 핀 내 고향 뒷산 - 따사한 봄볕을 쪼이며, 잔디 위에서 같이 놀던 순이, 노랑 저고리에 하늘빛 치마 - 할미꽃을 꺾어 들고 봄 노래를 부르던 순이 - 오늘 밤 정말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아직 해가 지기엔 시간이 좀 남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글 쓴 종이를 가슴에 품고 방바닥에 눕자, 방은 그만 캄캄해졌습니다.
참말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샘처럼 솟아오르는 지난날의 추억들.
정말 내가 민들레와 할미꽃을 좋아하는 까닭은 순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순이의 그 노랑 저고리가 어쩌면 그 때 내 마음에 그렇게도 예뻐 보였을까요?


III.

"순아! 오늘은 정말 네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감추려고 했지만 역시 알려 주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만 순아, 울어서는 안 돼! 응?"
"무슨 얘기냐? 어서 말해 줘!"

"정말 안 울 테냐?"
"울긴 왜 우니? 못나게 …"

"그래! 픽하면 우는 건 바보야, 울지 말아 응?"
"그래! 어서 말해!"

"저어 …"
"참, 네가 바보구나, 왜 재깍 말을 못하니? 아이 갑갑해 - 어서 말해 봐!"

"저어, 말이지, 이건 정말 비밀이야, 우리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랬어. 아무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지만 난 네게 숨길 수 없어. 우리는 며칠 있으면 38선을 넘어 서울로 이사를 간단다. 여기서야 살 수가 있어야지. 지난 해 8월 해방이 되었다구 미칠 듯 즐거워했지만, 우리는 토지와 집까지 다 빼앗기지 않았어? 지주라구. 그리구, 우리를 딴 데로 옮겨가 살라구 그러지 않아. 빈손이라도 좋아. 우리는 마음놓고 살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을 찾아가야 해 …"
"얘, 나보고 울지 말라더니, 제가 먼저 울지 않아?"

소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는 원산이나 함흥에 같이 가자던 순이, 너와 내가 헤어진 것은 겨우 소학교 5학년 때 …


 

 

 

IV.

이 얼마나 위대한 발명입니까?
생각한 대로 곧 꿈꿀 수 있고 그 장면을 곧 사진에 옮길 수 있다는 것은 …
잠을 깬 것은, 아니 꿈을 깬 것은 아침이었나 봅니다.
전혀 밖의 빛이 방안에 비치지 않아 때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내겐 시계도 없었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사진사가 있는 방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을 밀었으나, 문은 밖으로 잠겨져 있었습니다.
내가 손잡이를 돌리자 내 앞에는 한 장의 종이쪽이 날아 떨어졌습니다.

아직, 시간이 이릅니다.
그냥 거기서 2시간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면 사진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꿈을 찍는 사진관 주인 아룀. ]

"옳아, 아직 두 시간 더 있어야 된단다.
내가 너무 일찍 일어났는지도 몰라.
날이 아직 밝지 않았을까?
그 동안, 나는 어제 저녁 순이와 고향 뒷산에서 꽃을 따며 놀던 꿈을 다시 되풀이해 보자.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꿈이었나!
사진은 어느 장면을 찍었을까?
나와 순이가 나란히 살구나무 그늘에 앉은 장면일까?
그렇지 않으면 순이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일까?
그렇지도 않으면 순이가 내게 할미꽃을 꺾어 주는 장면일까?”

 

V.

내가 사진관 주인에게서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사진 한 장을 받아 들었을 때,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순이와 나의 나이의 차이였습니다.
실지 나이로는 순이와 나는 동갑입니다.
그런데 사진에는 여덟 해나 차이가 있는 게 아닙니까?
순이의 나이는 열 두 살 그냥 그대로인데, 나는 지금 나이 스무 살이니까요.
그 동안 나만 여덟 해 나이를 먹은 것입니다.
생각하면,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사실 순이도 북한 땅 어디에 그냥 살아 있다면 꼭 내 나이를 똑같을 게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그 뒤의 순이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순이는 언제나 열 두 살 그대로입니다.
스무 살 - 스무 살이면, 제법 처녀가 되었을 순이, 머리채를 치렁치렁 땋았을까?
제법 얼굴에 분을 발랐을지도 몰라.
지금은 노랑 저고리와 하늘빛 치마가 어울리지 않을 꺼야.
모처럼 찍어 준 꿈 사진도 그런 걸 생각하니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이게 제일 귀한 보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진을 가슴에 품은 채, 사진관 주인에게 몇 번이나 감사를 드리고 나는 그 곳을 나왔습니다.

벌써, 아침해가 하늘 높이 올랐습니다.
하루를 꼬박 굶었으나 나는 배고픈 생각이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내가 처음 앉았던 뒷동산에 와 앉아 다리를 쉬며 가슴속에 간직했던 사진을 꺼냈을 때, 나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내가 넣었던 곳에서 꺼냈는데, 내가 사진관에서 받아 든 순희와 같이 찍은 사진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동화집 갈피 속에 끼어 있던 노란 민들레 카드였습니다.


 

ps: 어린이날을 맞이하여서 강소천 선생님의 동화를 감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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