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이후로는 서서히 성인사회에서 필요한 기초지식들을 하나 하나 익혀가야 하는 시기로 본 것이다. 특히, 양반사회의 남자아이일 경우는 앞으로 학문을 익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는 꿈을 키우게 마련이다. 이때 좋은 놀이로 제시되었던 것이 승경도(陞卿圖) 놀이다. 승경도 놀이는 '종경도(從卿圖)', '승정도(陞政圖)', '종정도(從政圖)'라고도 하는데, 이는 '벼슬살이하는 도표'라는 뜻이다. 성현은 《 용재총화 》에서 이 놀이를 창안한 사람이 하륜(1377∼1416)이라고 기록하였다.
승경도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보통 길이 1.5m, 너비 1m 정도이다. 전체 면적의 3/4에는 300여 개의 칸을 만들어 관직명을 쓰고 남은 공간에는 놀이의 규칙을 적는다. 도표의 외곽에는 이른바 외직인 8도의 감사, 병사, 수사, 중요 고을의 수령을 배치하며, 중앙부의 첫 꼭대기에는 정일품(正一品), 그 다음에 종일품(從一品)을 늘어놓고, 맨 밑에 종구품(從九品)이 오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관직을 다 써넣지 않고, 도표 크기에 따라서 중요 관직을 적당히 배치한다.
놀이기구는 승경도와 숫자방망이, 각 색의 말이 있어야 하며, 놀이 인원은 보통 4명에서 8명까지가 적당하다. 두 패로 갈라서 순서에 따라 방망이를 두 번 굴려(첫번째는 문과/무과/은일/남행/군졸 등 말의 색을 정하고, 두번째는 각 출신별 시험을 결정하여 벼슬살이 시작점을 찾는다) 출신을 정한 다음, 말을 굴려서 누가 가장 빨리 높은 자리(문과출신은 영의정, 무과출신은 도원수)에 오르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중간에 벌칙에 해당하는 파직(罷職)이나 사약을 받는 경우도 있으며, 일부 벼슬에 따라서는 혜택 혹은 제한을 두는 규칙이 적용되어 긴장감을 더한다. 이 놀이를 통해서 사대부가의 남자아이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관직의 등급과 칭호, 그리고 상호관계를 익힐 수 있다. 그리하여 미래의 자아상을 미리 그려보고, 포부를 기르게 함으로써 학습동기를 유발하는 놀이라고 볼 수 있다.
종일 큰비가 내렸다…(중략)…심심해 군관들을 불러 종정도로 내기를 했다." -병신년(1596년) 3월 21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의 한 구절이다. 언뜻 봐도 알겠지만, 여기서 종정도는 놀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병영, 이곳에서 다른 이도 아닌 '군기의 화신' 충무공마저 한가할 때면 즐긴 놀이. 이것이 바로 승경도(陞卿圖) 놀이다. 종정도 또는 승정도 놀이는 승경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윷놀이가 서민들의 놀이였다면, 승경도 놀이는 '양반들의 윷놀이'였다. 승경도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봐도 조선 시대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오락 기구라고 나온다. 양반들이 어려서부터 즐긴 놀이였던 만큼 주제는 당연히 최대 관심사인 입신양명. 문관으로는 진사(소과에만 합격한 선비)에서, 무관으로는 한량(무과에 급제하지 못한 군인)에서 출발해 먼저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에 오른 뒤 명예롭게 퇴임하면 이기는 놀이다.
170개의 칸에 조선시대 벼슬의 이름을 촘촘히 적어넣은 놀이판, 승경도를 직접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놀이판을 구하기만 하면 놀이방법은 간단하다. 문과와 무과 중에 진로를 택한 뒤 윷을 놀아 말을 전진시키면 된다. 윷은 일반적인 4개짜리 윷을 써도 되고, 1~5 사이의 눈금이 모서리마다 새겨진 오각형 윤목 하나로 해도 된다.
복잡한 말판과 단순한 규칙. 언뜻 지루한 보드게임의 요건을 모두 갖춘 듯 보이지만, 승경도 놀이를 해보면 너무 재미있어 놀라게 된다.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재미도 좋지만, 중간 중간 섞여 있는 파직.귀향.사약 같은 '함정'들을 피하는 아슬아슬함도 쏠쏠하다. 함정에 걸린 사람은 또 그대로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곱씹으며 웃음 짓는다. 또 승경도 놀이를 하다 보면, 실컷 놀았을 뿐인데 조선시대 관직에 대해 '박사'가 되는 보너스도 있다. TV 사극을 볼 때 자막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잊힌 놀이였던 승경도를 부활시킨 것은 충청도 연기향토박물관의 임영수 관장과 우리전통놀이연구회원들. 이들은 박물관 전시물인 150년 전 승경도를 1년여 연구해 지난해 추석께 현대판 승경도를 만들었다. 개발 직후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연 시연회는 5일간 2500여 명이 몰리며 대성공을 거뒀다. 원래 판매할 계획이 없었는데, 당시 관람객들의 요청이 쏟아져 급하게 판매용 세트를 만들었단다. 이때부터 입 소문을 타고 넉 달여간 팔려나간 승경도 놀이 세트만 무려 1200개다.
'가다 서다'만 반복하는 화투일랑 치워버리고, 이번 추석에는 아이들까지 모두 둘러앉아 '영의정 되기'에 도전해보자. 놀이판은 연기향토박물관으로 전화하면 전국 어디서든 살 수 있다. 문의는 041-862-7449. 서울에서는 경복궁 내 민속박물관에서도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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