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창비시선 238)
문태준
(손에서 놓기가 아쉽기만 하다
목련화가 지은 하늘궁전에 가서 쉬고 싶다
뒤란에 가서 빨갛게 익은 앵두를 따먹고 싶다
상한 꽃에도 앉아 속삭이는 나비를 보고 싶다
우리가 눈길 주지 않아도 항상 거기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들에 대한 때늦은 기억으로....)
(序詩가 있다)
햇차를 끓이다가(p16)
서시(序詩)
멀리 해남 대흥사 한 스님이 등기로 부쳐온 햇차 한 봉지
물을 달여 햇차를 끓이다 생각한다
누가 나에게 이런 간곡한 사연을 들으라는 것인가
마르고 뒤틀린 찻잎들이 차나무의 햇잎들로 막 피어나는 것이었다
소곤거리면서 젖고 푸른 눈썹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간곡한 사연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뜨거운 솥에서 덖여지고
투박한 손에 의해 이리굴리고저리굴리고
아낙의 땀방울을 흠뻑 마셨음직한 사연일까.
비비꼬인 몸
풀어내며 삭신이 늘어지는 사연일까
그의 간곡한 사연들 아름다운 풍경에 녹아난다.)
[푸른 냉이]
칠년 된 푸른 냉이가 가늘고 긴 뿌리를 봄마당에 내놓았다
마른 둠벙의 물고기처럼 서서히 애처로운.
수탉 같은 봄햇살이 냉이를 쪼고 쫀다
[찔레 넝쿨에게]
찔레 넝쿨에게 오늘 바질바질한 참새떼가
찔레야! 찔레야! 실눈 좀 떠다오, 한다
[나비 가듯이]
나비가 꽃 따먹으로 가듯이 가고 싶은 곳
나비가 주물럭 주물럭거리며 날아가네
젖무덤처럼 물컹물컹한 당신의 고운 품
(어두워지는 것,
다 사라지는 순간.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순간.
어머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버무린다)
혀 (p71)
잠자다 깬 새벽에
아픈 어머니 생각이
절박하다
내 어릴 적
눈에 검불이 들어갔을 때
찬물로 입을 헹궈
내 눈동자를
내 혼을
가장 부드러운 살로
혀로
핥아주시던
붉은 아궁이 앞에서
조속조속 졸 때에도
구들에서 굴뚝까지
당신의 눈에
불이 지나가고
칠석이면
두 손으로 곱게 빌던
그 돌부처가
이제는 당신의 눈동자로
들어앉아서
어느 생애에
내가 당신에게
목숨을 받지 않아서
무정한 침빗이라도 될까
어느 생애에야
내 혀가
그 돌 같은
눈동자를 다 쓸어낼까
목을 빼고 천천히
울고, 울어서
젖은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