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속의 이야기

배재제복과 서재필

소담이2 2006. 3. 6. 07:40

 

 

서재필 박사의 실질적인 독립정신은 독립문에 아로새겨져 있다.
18세때인 1883년, 일본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한 그는 2년간 수련을 마치고 돌아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10대때부터 군복과 양복을 입었으며 최초의 미국 망명객이자 유학생이기도 하다.

당신 우리나라 관리들의 옷차림은 문무관 모두 공복차림에 양쪽 허리에는 넓은 띠를 달았는데, 이는 칼을 찼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녀의 옷에는 주머니도 없고 단추가 없어서 끈으로 묶게 되어있었다. 심지어 밥풀로 붙이기도 해서 누구와 크게 시비라도 하고나면 옷자락이 솔기마다 끊어지기도 했다.
서재필이 양복을 즐겨입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흰옷과 짚신으로 대변되는 의생활을 하고 있었다.

서재필은 31세때인 1896년, 조국에 다시 돌아와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조정에서는 1월 13일 문무관의 양복차림을 법령으로 정하고, 단발령, 태양력 사용 등 혁신정책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수구세력의 반동으로 임금은 러시아공관으로 파천되고(아관파천), 대신 신기선은 모든 혁신정책을 무효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서재필은 설득력있는 필력을 발휘해 그를 역적으로 몰고 백성들의 계몽에 앞장을 섰다.

독립신문 29호에서 그는 대신이 학생의 제복착용과 단발을 금지하자고 지시한 것에 대하여 격렬히 비판하는 논지를 폈다.
31호에서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새로운 제복을 입은 모습과 머리를 짧게 깎은 것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한국을 자주 들렸던 영국의 왕립지리학 회원 이사벨 버드비숀 여사는 배재학당 젊은이들의 새로운 차림을 보고 '이들의 모습이 참 씩씩해보여서 부정한 관리와 관원들이 당해내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1897년 독립문 준공식을 마치고 그 이듬해 다시 쫓기는 몸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사람은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 아래 과거의 수련생활에서 습득한 의술로 만인에게 봉사하며 해외에서나마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그의 나이 54세때 3.1운동이 일어나자 근근히 모은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모두 바쳤다. 그는 어디까지나 돕는자의 위치에서 일했으며, 과거에 참살당한 가족과 친척에 대한 보복은 생각하지 않았다.  

60세에는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을 규탄하였고, 그 뒤로 우국지사들이 힘쓴 결과 일본은 패망하고 한국은 해방되었다. 그의 나이 82세때였다.

대한민국의 탄생을 보고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그러나 곧 비극적인 6.25 전쟁 소식을 듣고 상심하였다.
'미국과 소련의 세력 싸움에 왜 우리 민족이 피를 흘려야 하나...'
중국의 대군이 밀려 내려온 1.4 후퇴 그 이튿날 서재필은 일생을 마쳤다.
조선 독립에 크게 기여한 서재필은 우리 민족이 잊어선 안될 인물이다.  


<서재필 박사 약력>

출생 :  1864년 11월 20일
사망 :  1951년 1월 5일
학력 :  워싱턴대학교세인트루이스교 세균학
약력 :  1884년 김옥균, 홍영식 등과 갑신정변 일으킴
1896년 독립신문 발간
1896년 이상재, 이승만과 독립협회 설립
1925년 호놀룰루 범태평양회의 한국대표로 참석
1947년 과도정부 최고정무관

(사진,약력 네이버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