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시간에 김경욱 작가님은 매우 젊어 보였다. 21세에 작가로 등단을 하고 문제성있는 젊은 글을 쓰면서 울산대학에서 학생들도 가르치며
글을 쓰는 일에 게으르지 않음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사회자이신 김원일 선생님 말씀이다. 또 앞으로도 끈임없는 글쓰기를 바란다는 부탁이시다.
이글에서도 장미라는 이름의 여인이 나의 눈에는 3사람만 보였는데, 평론가는 5사람이라고 한다. 독자들게서 5사람의 장미가 있는지 찾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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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그러나 운명 같은 건 없다. 다만 식어버린 피자 한 조각과 너무 진하거나 너무
묽은
자판기 커피 한 잔의 남루함만 존재할 뿐이다. 마치 변심한 연인이 영원한
사랑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어하는 것처럼. 운명?
그렇다.
운명이라는 것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믿거나 믿지 않을 뿐이다. 마치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라고 묻는 것처럼.
따라서 운명이라는 것은, 식어버린 커피 한 잔의 위안도 주지 못하는 그 뻔뻔하기
그지없는 녀석이란,
믿는 녀석들에게는 애인의 아랫도리처럼 달콤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녀석들에게는 바람난 애인의 아랫도리처럼 구역질 나는 존재인 셈이다.
요컨대 문제는 존재가 아니라 태도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운명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다. 이것이 지난 스물아홉 해 동안
내가 견지해온 태도이다. 나의 유일한 관심사는 그것이 얼마나 실감나는가 하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스쳐간 매력적인 여자의
모호하면서도 도발적인 눈빛이나,
땀에 젖은 손바닥에 한 움큼 잡히는 연인의 살진 젖가슴이나, 목덜미에서 하늘
거리는 솜털의 미세한
움직임처럼 실감나는 것 외에는 난 관심이 없다. 운명이니,
구원이니, 신이니 하는 형이상학 나부랭이들은 가능하다면 사양하고 싶다.
‘너바나Nirvana’라는 밴드가 있었다. 그 밴드의 리드 보컬인 커트 코베인은
1994년 사망했다. 4월 8일의
일이다. 자신의 집에서 총상을 입고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의문에 싸여 있지만 자살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서가 발견되었고 죽기 전부터 이미 치사량에 가까운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기 바로 전에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약물 중독 치료를 위한 재활원에
있기도 했다. 로커다운 최후가 아닐 수 없다.
언더그라운드 밴드로 출발한 너바나의
불가사의한 상업적 성공은 밴드의 멤버들조차
당황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당황할수록 대중적 인기는 높아만 갔다.
높이 날수록
추락에의 욕망은 강해진다. 21세기의 물질문명을 주도하는 컴퓨터 디지털
산업이 허름한 차고에서 시작되었듯이 그 물질문명을, 탐욕스러운
기계들을 깨부수라고
울부짖는 밴드들도 차고에서 출발한다. 삶의 아이러니란 그런 것이다.
평생 도박판을 전전하다
남해안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아버지라는
사내는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인생은 도박과 같아. 한 판의 게임인
게지.
게임에선 그 누구도 승리할 수 없단 말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뜻이야.
게임에서의 본질적인 승리자는 게임 그 자체인
거야. 아무도 게임에서 승리자가 될
순 없어. 아무도.”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죽는 순간에도 그는 게임을 하고 있었고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쓰러졌다고 했다. 그때 그는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손에 쥐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쥐고도 게임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궁극적인 승자는
그의 말대로 게임 그 자체였던 셈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는 평생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받아보지 못했다. 평생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패였던 것이다. 노름꾼의 최후 치고는 행복한 결말일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그가 내게 남긴 것 중에서 그래도 쓸 만한 것은 그 말뿐이다. 그의 삶은
전혀 교훈적이지 않았지만
죽음만큼은 뭔가 교훈적인 구석이 있었다.
“형사 양반, 혹시 커트 코베인을 누가 죽였는지 아시오?”
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형사에게 담배 한 개비를 얻어 피우며 내가 물었다.
나는 순순히 모든 것을 털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인생의
궁극적인 승리자는
인생일 뿐이니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을 게임에 참여시킬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패배자가 되어줄 용의가 있다.
모든 것은 비행기 안에서 시작되었다. 그 모든 것이 시작될 때 나는 제주 공항을 이륙한
아시아나 757기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기체는 상승을 멈추고 수평 비행을
하고 있었다. 난기류 때문에 비행기 동체가 약간 흔들렸지만 공포심을 자아낼
만큼은
아니었다. 간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커피 잔의 표면에 미세한 파문이 일 정도였다.
창밖으로는 어둠이 내리는 남해 바다가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내 시선은 옆좌석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부터
나는 그 여자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키색 바바리코트를 입은 그 여자가 들어선
순간부터 기내에는 미묘한 술렁임이 느껴졌다.
그 젊은 여자는 최근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연 배우였다. 비록 선글라스를 끼고 있기는 했지만
워낙
유명한 데다가 개성이 강한 마스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이제부터 나는 그녀를 ‘장미’라고 부른다.
장미가 내 옆자리에 앉는 순간 질투와 선망이 얽힌 시선들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특히 젊은 남자들은 질투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나는 휘파람을 불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참기로 했다.
휘파람을 불면 굴러들어온 행운이 거짓말처럼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장미에게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향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장미씨 맞죠?”
비행기가 난기류에서 빠져나와 안정될 즈음 내가 말했다. 장미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장밋빛 인생」을
보시나 봐요.”
「장밋빛 인생」은 그녀가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의 제목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본명이
아닌 드라마 속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 열렬한 팬입니다.”
장미의 고향은 제주도였다. 집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나의
직업은 사진작가
쯤으로 해두자. 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주로 무엇을 찍느냐고
장미가 내게 물었다. 나는
그냥 이것저것을 찍으러 다닌다고 얼버무렸다.
브라운관에서 볼 때보다 장미의 얼굴은 작아 보였다. 얼굴뿐만 아니라 몸매도 더 호리
호리했으나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았다.
“오래전에 읽은 소설인데, 그 소설 속에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나죠.”
장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여자 주인공은 유명한 탤런트였지만 남자는 텔레비전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기내의 모든 사람들이 그 탤런트를 알아보는데도 남자만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죠.
그런데 두 사람은 나란히 앉게
되었어요. 마치 지금의 우리처럼 말이죠.”
표정을 보니 장미는 그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그
두 사람.”
“그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해피엔드군요.”
“미안하지만, 해피엔드는 아니에요.”
“왜죠?
여자 주인공이 죽기라도 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유감스럽게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이
코피를 흘려요.”
“코피라고요?”
장미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장밋빛 인생」에서도 남자
주인공과 장미가 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나게 되죠.”
나는 대단한 사실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약간 호들갑을 떨었다.
“「장밋빛
인생」을 자주 보셨군요.”
장미는 자신의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자 금세 생기를 되찾은 듯했다.
“그럼요. 첫 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놓치고 계속 보아온걸요. 쭈욱……”
내 과장된 말투에 장미는 재미있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그런데 그
남자 주인공과 장미는 어떻게 되나요?”
“그건 비밀이에요. 물론 대본을 받기 전엔 저도 알 수 없어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장미는 생글거리며 내게 물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뭔가를 물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쁜
나머지 어이없는 대답을 해버리고 만다.
“코피를 흘리나요?”
때마침 장미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나의 어리석은 대답도 그 갑작스러운 신호음에 묻혀버렸다.
장미는
비행기 안에서 휴대 전화가 울린 사실에 당황한 듯 핸드백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전원을 꺼버렸다.
주위의 시선이 다시
장미에게로 쏠렸다. 바로 뒤쪽에 있던 스튜어디스가 미소를 지으며
기내에서는 안전한 운행을 위해 휴대 전화나 노트북 피시 같은 전자 제품을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면서 스튜어디스는 작은 메모 용지와 펜을 내밀었다.
사인을 해달라는 거였다.
장미는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며 메모 용지에 시원스럽게 사인을 했다.
비행기는 어둠 속을 날고 있었다. 비행기 아래로 깜박거리는
작은 불빛의 숫자가 많아진
걸로 보아 서울 상공을 날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착륙한다는 내용의
방송이
전달되었다. 나는 사탕을 입에 물었다. 그러나 장미는 내가 권하는 사탕을 사양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하고 공항 청사까지 가는
동안에 승객들은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났다. 성질 급한 건 알아주어야 했다. 착륙하는 동안에 일어나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는 좌석 위의 라커에서 짐 가방을 꺼내고 있었다. 장미는 내게
목례를 보내고 게이트 쪽으로 걸어나갔다.
가방을 내린 나는 그녀가 앉았던 좌석에 휴대
전화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미의 휴대 전화였다.
그녀는 이미 게이트
쪽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게이트
쪽으로 나아갔다. 비좁은 통로 때문에 생각만큼 빨리 빠져나갈 수 없었다.
장미는 공항
청사 어디에도 없었다. 연인의 팔목처럼 손에 쏙 잡히는 그 작고 앙증맞은 물건을 만지작
거리며 나는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장미는 비행기에서 한 사내를 만난다. 비행기에서 그 사내를 만날 때만 해도 장미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서울의 어느 구청이 운영하는 도서관의 사서였다.
그러니까 여기서 평범하다는 말은 그 이후의 삶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장미가 비행기
에서 만난 사내는 역시 평범한(그는 이후 줄곧 평범하다), 운명적으로 평범함을 걸치고 태어난
사람이다. 사내는 장미가 마음에 들었다. 당연했다. 그녀는 젊고 예뻤으니까.
사내는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소개한다.
그는 사진작가이다. 사내는 장미의 얼굴 선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장미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자신이 대학교 다니던 시절에
읽었던
소설 이야기를 꺼낸다. 역시 그들처럼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나 결혼하고 이혼하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여자 주인공은 유명한
탤런트였고 요정에도 나가는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내는 소설 속의 여자 주인공이 탤런트였다는 사실과 이혼을 했다는
사실을 일부러 숨긴다.
자신의 인생은 해피엔드로 끝났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장미의 얼굴에는 뭔가 비극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장미의 매력이기도 했다. 달착지근하면서도 불길한 매혹의
냄새를 풍기는 여자였다, 장미는. 인물 사진을 많이 찍은
사내로서는 장미의 얼굴에 언뜻언뜻
비치는 그 어두운 광채를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소설의 비극적인 결말에 대해 입을
다문
것도 어쩌면 그 불길하면서도 매혹적인 광채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당시만 해도 스스로 그 광채를 느끼지 못해 평범함의 베일을
걸치고 지내던 장미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내가 싫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사내의 직업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
세계의, 사물의 이미지를 좇는 일들이 좋았다. 하루 종일 볕도 잘 들지 않는 어둑어둑한
공간에서, 그것도 대부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써놓은 종이 더미에 둘러싸여 있는
자신이 한심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조차도 없는
장미로서는 딱히 갈 만한 곳도 없었다. 그나마 지금 다니고
있는 도서관 사서 자리도 구청 서무과에 있는 친척의 입김으로 겨우 얻을 수
있었다.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셈이었다. 명색이 도서관 사서라지만 장미가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장미에게 도서관은 할리우드의 공포 영화에나 나올 법한 납골당 같은
곳이었으니까.
장미가 고등학교 졸업장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그녀가 퇴학당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영어 선생의 아이를 임신했다. 유부남이었던 영어 선생과 장미는
학교에서 쫓겨났다.
아이는 지웠다.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유부남인 영어 선생과 관계를 가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어 선생은 입시 학원가를 전전한다고 했다. 그후로도 종종 전화가 걸려왔다. 늘 술에 취해 있었다.
문장은 토막나기
일쑤였고 사랑, 운명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가끔 흐느끼기도 했다.
장미는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이 남자는 가망이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1. 고양이의 사생활
2.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3. 만리장성 너머 붉은 여인숙
4. 거미의 계략
5. Insert Coin
6. 토니와 사이다
7. 우리가 정말 달에 갔던 것일까
8. 늑대인간
9. 순정아 사랑해
10. 토성에 관해 갈릴레이가 은폐한 몇 가지
사실들
11. 선인장
12. 미림아트시네마
김경욱 [ 작가 소개]
1971년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아웃사이더>가 당선되며 문단에 나와 소설집 <바그다드 카페에는
커피가 없다> <베티를 만나러
가다> 와 장편소설 <아크로폴리스>
<모리슨 호텔> <황금 사과>를 펴냈다. 지금은 울산대학교에서
창작론
등을 강의하며 소설 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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