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속의 이야기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소담이2 2005. 12. 5. 23:30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그 긴 생명의 비밀

  

조세희(소설가)

 

   저는 본래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고등학교 때부터 품고 있었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어머니는 시골에 계시고, 저만 혼자 서울의 친척집에 얹혀 살았습니다. 소년에게 서울은 굉장히 살벌한 곳이었고, 또한 아주 쓸쓸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친구들은 별로 없었고,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해질녘까지 운동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면 저녁에는 굉장히 심심할 텐데 뭘 하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제가 다니던 중학교에 '적십자 문고'가 있어서 책을 대출해 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심심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벗을 찾은 거죠. 그런데 제가 운동을 하다가 늦게 책을 빌리러 가면, 그 당시 학생들 사이에 인기 있던 [벌레 먹은 장미], [울면서 넘는 고개], [자유부인] 등은 진즉 다 대출이 되고 없었습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2학년 1학기 때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대출해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뒤에 물론 [죄와 벌]도 읽었습니다. 적십자 문고에서는 또 한 작가가 늘 쓸쓸하게 버림받고 있었는데, 그건 톨스토이였습니다. 저는 그래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빌려다 탐독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두 권의 책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읽은 소설입니다.

 

 

친구들이 빌려가고 남은 명작들 속에서

  그 뒤에는 그분들의 작품을 다시는 읽지 않았지만 중학교 2학년 1학기에 읽은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내 가슴을 뻥 뚫어 관통해 버렸습니다. 죽은 지 100년, 200년이 가도 여전히 문학사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두 분의 명작들과 그 뒤에 읽은 몇 권의 책들로, 조세희는 무장을 했던 겁니다. 중학교 때 만날 수 있었던 10권 이내의 황금같은 책들이 저의 내면에 소설가로서의 바탕을 형성해 주었던 겁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저는 세칭 모범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2,3학년 때 저는 학교를 며칠 다니지를 않았어요. 고등학교 내내 통틀어 15번 안팎으로 학교에 가고도 졸업을 했습니다. 공부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저 자신의 경우를 보면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의 서라벌예대 진학에 얽힌 에피소드입니다. 한번은 김동리 선생님으로부터 저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찾아갔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보자 "너 어느 대학 갈래?"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친구가 서울대에 가자고 해서 참고서를 샀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앞으로 글을 안 쓸 생각이냐고 물으셨고, 저는 쓸 작정이라고 말씀드렸죠.

 

 선생님께서는 작가로서 대성하려면 서울대보다는 서라벌예대 쪽이 낫지 않겠느냐고 권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서라벌예대에 진학하면 장학금과 용돈도 주선해 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안에 숨어 있는 작가로서의 싹을 알아보고, 이것저것 챙겨 주시는 김동리 선생의 뜻에 따라 저는 서라벌예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가서도 2년 동안 몇 시간 나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어머님이 편찮으시기도 했지만 김동리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게 제가 벌써 아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김동리 선생님의 강의는 학생들로 하여금 글을 써 와 발표하게 한 다음 "문장이 어떻노? 구성은 어떤가?" 묻고 토론하는 것의 반복이었습니다. 절더러 강의를 하라고 하면 작가가 되면 어떻게 되고, 10년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이며, 한국의 역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등 모름지기 작가가 갖춰야 할 품성을 일깨워 주었을 텐데 선생님은 많은 과정을 생략해 버리셨습니다.

  

서라벌예대 2년 과정을 마치고 나니까, 이번에는 황순원 선생께서 너 어느 대학으로 편입할 거냐고 물어 오셨습니다. 처음에는 다시 대학에 갈 생각이 없었지만, 역시 공부만 잘하면 대학원까지도 장학금을 줄 테니 함께 공부해 보지 않겠느냐는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경희대 3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와 경희대 국문과를 나왔고, 한국문학사상 두 거목인 김동리와 황순원 두 분 선생님의 그늘에 들 수 있었습니다.

  

학교라는 것은 어디에나 있지요. 선생님의 그늘이 있기에 학생들이 모이는 겁니다. 이 자리에 들어올 때 이곳을 또 하나의 교실로 보면 되는 겁니다. 이 교실, 학교, 공부 이 이야기만 하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세계의 입구에 들어서 있는 겁니다. 이렇게 두 거목의 그늘에 들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성적을 내기 위한 공부는 아니지만 제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를 마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다

  신춘문예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신춘문예에 응모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고인이 된 친애하는 한 글친구의 엉뚱한 발상이 저로 하여금 문을 두드리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평소에 제주도로 놀러 가는 게 꿈이었던 이 친구가 불쑥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여자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날 생각인데, 신춘문예에 응모해서 당선이 되면 그 상금으로 함께 제주도로 뜨자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신춘문예 상금이 2,3만원 할 때이니 요즈음 화폐 가치로 치면 2,3백만원은 족히 될 겁니다. 그만한 액수이면 셋이서 제주도에 가고도 남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그 후배의 작품을 가져오게 해서 읽었더니, 이건 떨어지기에 딱 알맞게 보였습니다. 저는 그 녀석에게 "너 여자 친구한테 제주도에 가기로 했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에게, 저는 "너는 허풍쟁이가 되었어." 하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할 수 없이 제 작품을 내기로 했습니다. 그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기였는데, 위로하기 위해서 두 편을 써둔 게 있었거든요. 녀석에게 며칠이 마감이냐고 물어보니 내일 저녁이라는 겁니다. 그 때 마흔 몇 장 써놓았던 것을 밤새워 아흔 장으로 늘려서 그 친구가 갔다 넣어 주었지요. 그건 부정탄 작품이고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니지요. 고등학교 학생의 아주 유치한 작품이지. 그렇게 해서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돛대 없는 장선(葬船)]이 당선되었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종이를 낭비하는 글을 쓰지 않는다

  그렇지만 등단 후, 저는 10년 동안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왜 내가 포기했겠습니까? 물론 세계적인 작가들, 즉 헤밍웨이나 포크너나 유럽 쪽의 사르트르나 까뮈, 또 아주 불행한 백인 작가였던 카프카 등을 봅시다. 우리는 쉽게 이야기하지만, 이 사람들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몇 백년이 가도 죽지 않을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헤밍웨이나 포크너, 사르트르, 까뮈는 내가 장담을 못해요. 그 사람들은 2백년까지는 살아남을 겁니다. 얼마나 긴 세월입니까. 나는 지금 60년을 살고서 이렇게 힘이 드는데….

  

그 당시에 저는 글을 쓰려고 하다가 포기했었습니다. 왜 포기했느냐. 물론 외국의 그 작품들뿐만 아니라, 그 뒤에 우리 조선시대의 작품에서부터 북으로 간 중요한 선배 작가들의 작품까지 다 섭렵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 '아, 이런 분들은 우리 역사의 어느 부분에 채여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구나. 김동리 선생님은 편하게 사시다가 왜 극우(極右)의 입장으로 평생을 사셨을까. 황순원 선생님은 굉장히 깨끗하고 존경을 받을 만한 분인데 [소나기]의 세계와 또 [카인의 후예] 그 뒤가 왜 확장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북으로 간 이태준 선생님은 우리 역사의 무엇이 딴지를 걸어서 이렇게 불행하게 되셨고, 임화 선생은 왜 이렇고 조명희 선생은 왜 저렇게 되셨을까.' 하는 생각도 품게 되었습니다.

 

 제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다행히 글을 썼기 때문에, 시간과 싸우면서 그분들보다 더 오래갈 수 있는 일을 기왕에 벌써 강구해 놓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역사가 불행한 역사를 계속한다면, 난쟁이는 쉽게 죽을 수가 없게 될 겁니다. 그런데도 나는 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교육시킨 것은 아주 뛰어난 작가들의 발군의 명작들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욕심을 낼 수가 없나? 내가 한국의 우물 속에 살고, 이 안에서 숨을 쉰다고 해도 왜 나는 욕심을, 뛰어난 작품을 쓸 수 있는 그런 욕심을 안 내나?' 그 즈음에서 나를 돌아보니 나를 에워싼 한계가 보였습니다. '왜 하찮은 작품을 내서, 나무 몇 그루 없애면서 이 짓을 내가 왜 하나.'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소설 쓰기를 포기했었습니다.

  

작품다운 작품을 쓰지 못할 바에는 안 쓴다는 선에서 포기한 거죠. 그런데 70년대의 시대 상황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것입니다. 70년대는 바로 우리 현대사상 제3세계의 현실에서는 아주 하찮은 쓰레기 같고 아주 바보 같지만, 제일 존경하는 대통령으로도 거명되는 박정희의 독재 정치가 국민들의 숨통을 막던 시절이었습니다. 민주화를 외치면 잡아가고, 자유을 말해도 잡아가는 이 세상에서, 교육을 받은 한 사람의 시민 또는 국민으로서 어떻게 숨죽이고 있을 수 있나 하는 속으로부터의 욕구가 펜을 들게 한 거죠.

 

 그 당시에 저는 어느 잡지사에 몸담고 있었습니다. 70년대에 업무량은 과중하고 사람은 조금 주는 직장에서 일을 했어요. 그때 제가 다니던 잡지사가 청진동에 있었는데, 이름을 대면 여러분도 금방 알 만한 70년대의 유명 작가들이 내 잡지사 앞을 지나가다 들러 "어이, 조세희 뭐해. 왜 작품 안 써?" 하고 불쑥불쑥 한마디씩 던지곤 했습니다. 내가 볼 때는 이 친구들이 헛짓을 하고 다니는 것 같아 묵묵히 응수를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제 딴에는 '이름 낸다는 것은 얼마나 하찮은 건가. 글을 써서 돈을 번다는 것처럼 하찮은 것이 세상에 어디 있나. 더 큰돈을 벌려면 땅을 사서 땅 장사를 하지. 그런데 이 친구들이 나는 어떤 것 때문에 글쓰기를 포기했는데 감히 내 앞에 다니면서 큰 소리를 치고 다녀.'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노골적으로 아주 힘들게 우리 국민 전체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듯 험악한 짓을 일삼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을 배경으로 연작소설도 나오고, 황석영이 성장하는 노동자층의 모습을 담은 [객지]를 쓰고, 김지하가 [오적]이라는 담시를 썼다가 감옥에 들어가서 고문을 받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한쪽에서는 움츠리고들 있었고, 무슨 대중소설 써서 영화화되는 것이 제일인 양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돈 몇 푼 벌었다고 우쭐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저는 믿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직장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겁니다.

 

 나로서는 가만히 제3세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숨은 콱콱 막혀왔지만, 한국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 곳인 서울대의 정치학과쯤 되면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됐겠지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백인 학자가 써놓은 짧은 7,80장짜리 번역서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군부정치가 인간의 세계에 어떻게 해악을 끼치는지 씌어져 있는 책을 하나 쉬쉬하면서 겨우 번역해서 돌려보는 게 최고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명색이 최고 엘리트라는 서울대 정치학과, 경제학과, 법대 친구들이 속으면 한국 전체가 속는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난쟁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내 수업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면 난쟁이를 왜 쓰기 시작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막 서른 살로 접어들어서의 일인데, 한 촉망받는 젊은 작가가 어느 신문에 기고를 했어요. '아무개야, 걱정하지 말아라. 곧 우리가 지배할 세상이 올 거다.'라는 투의 칼럼이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반사적으로 '지가 뭘 지배해. 뭘 다스려. 무슨 역할을 해. 자기는 섹스 이야기해서 돈 몇 푼 번 작가인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군. 준비는 하나도 안 되어 있는데, 달라지긴 뭐가 달라져.'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지금 천하 없는 독재자가 와서 마구 괴롭혀도 속수무책이죠. 분노하고 증오하고 대드는 것도 힘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판단을 흐려놓는 그 작가의 글에 팔팔한 삼십대의 나는 화가 났었습니다. 안락한 생활만을 꿈꾸는 동년배 친구들과 나라의 현실이 겹쳐져 가슴이 아팠던 거죠.

 

철거민들의 눈물겨운 삶을 보며

  독재와 전쟁의 공통된 특징은 무엇입니까. 폭탄이 어디선지 모르게 날아온다는 것입니다. 한국전쟁에서만 동족상잔으로 550만 명이 죽어간 마당에, 그 불행이 계속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550만이면 옛날 조선시대의 총인구입니다. 기근이 들면 550만이 되고, 풍년이 들면 550만에서 600만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게 조선시대의 인구였으니, 얼마나 큰 비극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일단의 내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싸울 힘이 없는 저로서는 유일한 무기인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감옥 따위에 가서 가짜 영웅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써서 판매 금지가 되면 절대 안돼. 소수의 독자들에게도 전파가 되어야지. 이 책은 살아 있어야 돼.'라는 목표를 속으로 새기면서 써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를 써놨을 때 "조형 이거 참 좋습니다." 하고 옆자리의 동료가 말했습니다.

  

그걸 쓰는 과정에 제게 잡지 편집부의 데스크 책임이 주어져 악조건하에서 썼고, 데스크일이 계속되어 지쳐서 조금 나은 환경을 찾아 어느 신문사 출판국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난쟁이를 더 편한 입장에서 쓸려고 했더니 거기에서는 사람을 더 심하게 비인간적으로 괴롭히는 거예요. 난쟁이는 그 조건하에서 씌어졌습니다.

 

 한편 한편을 열두 편으로 묶었지요. 난쟁이 시리즈로 맨 처음 쓴 [뫼비우스의 띠]는 한 50장 정도 될 거예요. 그것을 쓸 무렵에는 동료들에게 사장이 부르면 둘러대 주도록 부탁한 다음, 다방이나 한가한 자리를 찾아가서 썼습니다. 난쟁이가 사는 동네에 방죽이 하나 있고 굴뚝이 나오고 철거 지역, 그런 풍경이 나옵니다. 글을 쓰겠다는 분들은 성공작이 아닌 실패작으로서 난쟁이를 한 번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때는 그것을 쓰기 위해서 철거 지역에 취재를 가고, 공장 아이들과 같이 살기도 했습니다. 철거반이 철퇴로 꽝 부수면서 들어오는 게 있어요. 영희의 펜지꽂 이야기가 나오고 난쟁이 부인이 밥상을 마주했는데, 거기에 마른 고추와 보리가 많은 밥이 차려진 것으로 표현된 바로 그 집입니다. 거기에 지섭이라는 인물이 고기를 사들고 가서 국을 끓이고 굽고 해서 밥을 먹는 장면이 나올 겁니다.

 

 작품 속의 지섭을 저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내가 취재했던 어느 철거민의 집을 찾았을 때였습니다. 마침 식사 때가 되어서 그분들이 끓여서 내온 국과 함께 밥을 먹고 있는데, 쿵 하고 철퇴가 내려쳐지는 거예요. 그 때 가슴이 얼마나 뛰었었는지 말할 수도 없지요. 그 때는 여러분도 그 현장에 있었더라면, 투사가 아니라도 나가서 멱살을 잡고 싸우게 될 겁니다. 그 와중에 저도 할 수 없이 동네 사람의 일부가 되어서 함께 철거반원들에 맞서서 싸웠지요.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내가 다니던 잡지사 부근의 문방구에 들러 모나미 볼펜 한 자루와 작은 노트 한 권을 샀습니다. 그것이 내가 [난쟁이가 쏘아올린 공]의 시작이었습니다. 거기에 뫼비우스의 띠, 칼날, 이 모든 작품들을 하나하나 써넣기 시작한 거죠.

  70년대 비평가들에 의하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는 10만 개, 아니 백만 개의 한계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됩니다. 민중문학 진영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순수문학을 하는 쪽에서는 또 어떻게 이야기하고…. 돌려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문학과 지성] 그룹에서 보면 제 작품은 과격할 수 있고, [창작과비평] 그룹 시각에서 보면 내 작품에 순수문학 쪽에 편향되어 보이는 거죠.

  

[뫼비우스의 띠]가 발표되었을 때 '문학과지성'에서 제일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어느 쪽에서 보면 내 난쟁이가 말할 수 없는 한계가 많은데, 이쪽에서는 아주 재미있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면 여우들은 재미있는 부분만 보지요. 이것이 얼마나 큰 함정입니까.  [난쟁이] 안에 숨겨놓은 게 얼마나 많습니까. 실제로 책을 냈을 때 정부와 기관에 있는 사람들, 지금은 은퇴했지만 이름을 대면 금방 알 수 있었던 사람들이 난쟁이에 밑줄을 빨갛게 그어가지고 그게 미심쩍어서 청와대까지 보냈어요. 한국은 얼마나 작은 세상입니까. 누가 해서 올렸다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와요.

 

 이렇게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었던 게 난쟁이 시리즈였습니다. 그것들을 쓰기 시작할 때 [뫼비우스의 띠]처럼 쓰지 않고 '아, 무섭다. 답답하다!'는 식으로 산문을 썼다고 하면, 제 책은 그냥 죽었을 겁니다. 저는 한국에서 지금 굉장히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부자가 와서 저를 설득해서 쓰러뜨리지는 못할 겁니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실제로 나왔을 때 어느 재벌 회장단 모임에서 한 회장이 씩씩대면서 "여기 조세희라는 여류 작가를 아는 사람 없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회장 밑에서 일을 하는 서울대 출신 인텔리 하나가 아주 높은 자리에 있었는데, 그 회장 귀에 대고 조세희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이고, 그 사람이 쓴 것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라고 귀띔했더랍니다. 그러자 그 회장은 "그런 작가라면 우리는 기관이 아니니까 막 잡아다 혼내면 안 되고 우리는 그 사람들을 설득해서 우리편으로 삼아야 된다."고 말했답니다. 이런 불행한 일이 있은 다음 작가들을 각 재벌 그룹들이 앞다투어 스카웃해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내가 갔으면 지금 부자가 되었을 겁니다, 그 당시 내가 돈 벌 생각을 했으면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겁니다. 어떻게든지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내 메시지가 전달이 되도록 써 나갔습니다. 저는 훌륭한 작가가 되려고 쓴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작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몇 천년 동안의 역사 속에서 문학이라는 이름, 문학의 장르가 모든 다 실험해봤던 모든 부분이 저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을 하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겁니다. 동화적인 것도 있고, 아주 짧은 문장으로 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아주 아름답기도 하고 달콤한 문장도 있는 등 별의별 요소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결국 이런 요소들 때문에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부분이 아주 많아서, 그 당시 실제로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는 사람들을 곤란하게도 했습니다. 그들이 이걸 어떻게 해야 될지 쩔쩔 매는 사이에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세상에 나와 이미 4판을 거듭한 다음이었습니다. 그 뒤에 판금시키자 했을 때는 벌써 난쟁이는 많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다양한 삶, 생각을 위한 함정을 많이 담아

  실제로 운동권이나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하찮은 작품이기 때문에 읽으면 안 된다고 뿌리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뿌리치던 이들이, 더 험한 세상이 와서 감옥에 들어갔어요. 내가 취재했던 노동자들도 감옥에 들어갔어요. 초등학교 4학년 정도밖에 안된 학력을 가진 어느 노동 운동가가 보니까 눈물이 나고, 이걸 읽지 말라고 하던 친구도 감옥 안에서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러 가지로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것들이 많이 숨어 있어서, 다시 지시를 내려 후배들에게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참조하라고 권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확산이 된데다가 중산층이 아파트를 사놓듯이 가수요가 붙어서 난쟁이는 폭발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던 거지요.

 

 이것은 12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하나 쓸 때는 나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잘라서 썼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독자들 가운데 좀 예민한 사람, 훈련받은 사람들이 12편의 단편을 장편으로 재구성해서 읽어 주었던 거예요. 한 작가의 노력과 독자의 노력이 어울려져서 한해의 완성에 가깝게 탄생된 작품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2편을 쓰면서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늘 고민한 게 있어요. 내가 유치한 말로 세련되게 써서 그런지 크게 문제된 것은 늘 없었어요. 물론 책이 책방에서 수거되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조형,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마. 기분이 좀 나빠." "뭐 어떻게 되었대?" 하는 동지애적 연결이 있었지요. 그래도 나중에 내가 도저히 이것은 안 되겠다 해서 빼 놓았던 문장들을 버리지 않고 놓아 두었습니다. 최근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22년을 찍은 다음 출판사를 옮겨 펴내면서, 그 당시에 빼놓았던 중요한 여섯 군데 문장들을 다시 넣으려고 하다가, 제가 교정을 보면서 다 빼고 한 군데만 넣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밤 새워서 눈물 날 정도로 썼던 부분이었으니까요. 그 뒤에 후배들에 의해서 작업된 부분도 있지만, 내 말이 너무 구호성 쪽으로만 나갔기 때문에 그것을 빼놓은 거죠. 한 군데는 살려놨어요. 지섭이라는 인물이 하나 있고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큰 아들이 재판을 받아서 사형을 받게 되는데, 그 과정에 부자 쪽 입장에서 보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것은 뭐냐하면 이 노동자와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나까지 포함이 되어서 약자 쪽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자본주의의 달콤한 열매는 도덕적인 것에서 먼 아주 비도덕적인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짐승과 똑같은 것들에게만 달콤한 것이 간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열심히 혁명을 꿈꾸고 하루하루의 생활을 혁명과 연결지어서 생각하고 생활하면서도 아직까지 혁명이 오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열심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내용을 갈무리해 놓고 있다가 이번에 넣었습니다.

 

 이상으로 대충 열두 편의 난쟁이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두서없이 말씀드렸습니다. 작가의 사명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앞으로도 시대의 표정과 나아갈 길을 직시하는 작품들을 써나갈 것입니다. ◈  문예진흥원 금요일의 문학 이야기  [ 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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