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가 맡은 내솔(奈率)의 정확한 위치와 복색
18회를 보면 태학사의 수장으로 복귀할 줄 알았던 목라수박사가 부여선세력의 저지로 수장에 임명되지 못하자, 아좌가 초강수를 펴
온돌과 전의성전투에 전공이 있는 장이를 기술사의 수장인 내솔에 임명한다.
오늘은 내솔과 관련된 정확한 의미와 이에 부가하여 백제의 관등조직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은진과 우수가 얘기한 중앙관서인 22부는 “마부와 객부(22부의 하나죠)”라는 제목으로 설명하였으니 그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 관등
삼국사기 고이왕 27년조에 의하면 관등의 명칭과 관등에 따른 부제가 망라되어 있다.
27년 봄 정월, 내신좌평을 두어 왕명의 출납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두좌평을 두어 물자와 창고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법좌평을 두어 예법과 의식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위사좌평을 두어 숙위 병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조정좌평을 두어 형벌과 송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병관좌평을 두어 지방의 군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였다.
또 달솔, 은솔, 덕솔, 한솔, 내솔, 장덕, 시덕, 고덕, 계덕, 대덕, 문독, 무독, 좌군, 진무, 극우 등을 두었다.
6좌평은 모두 1품,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내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었다.
2월, 6품 이상은 자주빛 옷을 입고 은꽃으로 관을 장식하고, 11품 이상은 붉은 옷을 입으며,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덕부터 문독까지는, 띠[帶] 색을 각각 달리하여 장덕[紫], 시덕[黑], 고덕[赤], 계덕[靑], 대덕과 문독[黃]이며, 그
이하는 백(白)색이었다.
처음에는 좌평과 솔, 그리고 덕을 기본으로 한 관등체계로 조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나 신라와는 달리 이를 관등이름에는 상당히 세련된 의미를 지녔다는 느낌이 든다.
가령 좌평은 보좌하여 다스린다. 솔에는 거느린다. 덕에는 우두머리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수장층의 호칭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들어오거나 아니면 새로 만든
관등명이라고 할 수 있다.
좌평이나 달솔과 같은 관직의 명칭이 중국식으로 아화되어 있고, 복식이름도 중국화 되어있어 문화전반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국지적인 요소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전국을 5부로 나누었던 것처럼 5라는 숫자를 단위로 관등제와 지방통치체제를 나누었다.
좌평에서 대덕까지는 모두 11품이다.
제1위 좌평(佐平)부터 제6위 내솔까지의 이른바 솔(率)계통 관료들은 정치·행정·군사분야의 지휘관으로 생각되며, 제7위 장덕(將德)부터 제11위 대덕(對德)까지의 덕(德)계통 관료들은 각 분야의 실무진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12품과 13품은 문독과 무독이다.
문관과 무관의 구별이 생겼다기보다는 일정한 군사적 의무에 대한 분기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제12위부터 제16위까지의 문독(文督). 무독(武督), 좌군(左軍), 진무(振武), 극우(克虞) 등은 대부분 군사 행정과 관련된 하위 관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독이나 13~16품의 하급관리들의 경우에는 소관업무와는 별도로 일정한 군사적 의무나 역할이 전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관산성전투에서 성왕이하 4명의 좌평이 전사함으로써 알 수 있듯이 관리들은 군사에 대한 구속력을 강하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6관등제는 좌평과 솔계 관등, 덕계 관등이 핵심으로서 상부를 구성하고 좌군(佐軍)·진무(振武)·극우(剋虞)는 하부를 구성하였다.
이 중 솔계 관등과 덕계 관등은 5등급으로 이루어졌다. 각 관등의 정원은 좌평은 6명, 달솔은 30명이었으나 은솔(恩率) 이하는 정원이 없었다.
■ 좌평
최고관등인 좌평은 관직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좌평의 정원은 처음에는 1명이었으나 전지왕대에 상좌평이 설치되면서 분화되기 시작하여 사비성도읍기에 중좌평과 하좌평도 생겨났는데 상자평은 대좌평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왕대까지 좌평의 정원은 5명이었다가 관산성전투 이후 당나라의 6전조직의 영향을 받아 7세기대에는 6좌평으로 확대되었다.
■ 좌장
고이왕 7년조에 의하면
"진충(眞忠)을 좌장(左將)으로 삼고 모든 군사업무를 맡겼다" 그리고 14년조에는 "진충을 우보로 삼고, 진물(眞勿)을 좌장으로 삼아 군사업무를 맡겼다"
좌장은 내외병마사의 일을 보았는데, 도성과 지방의 군사를 담당했던 요직이었다.
■ 왕, 후, 장군, 태수제
백제를 건국한 세력이 만주에 소재한 부여에서 기원하였던 만큼 부여를 위시한 북방적인 요소가 강하게 남아있다.
5세기중반에 등장한 좌현왕과 우현왕제도는 흉노를 비롯한 유목사회에 등장하는 직제이다.
국왕을 축으로 하여 그 좌우에 왕위계승권을 가진 근친왕족들을 좌현왕과 우현왕에 임명하여 영토의 동방(일본)과 서방(중국대륙의 특정한 지역)을 각각 통치하게 하였다.
그 밑에는 지역을 관장하는 지명을 가진 왕들과 후를 두었다.
송서에 의하면 개로왕은 즉위 3년인 457년에 유송으로부터 진동대장군을 제수받았다.
장군호를 제수받은 11명의 귀족 가운데 왕족인 정로장군 좌현왕 여곤이 보인다.
개로왕대의 경우 좌현왕과 우현왕, 불사후,그리고 사신의 관직으로 태수가 보인다.
왕과 후 앞에 그리고 태수앞에 붙여진 지명은 영산강을 위시한 전라남북도로 비정된다.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태수들의 경우는 중국대륙과 위치한 지역의 태수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백제가 이들 지역에 직접 진출했다기보다는 사신으로 파견된 한인계 백제인들의 연고권을 인정해 준다는 차원, 백제적인 세계관에서 나온 듯하다.
■ 장사, 사마, 참군, 대사
장사, 사마, 참군, 대사는 중국에 파견되는 외교사절의 직함에서 보인다.
우현왕이 관장하는 중국에 파견하는 사절에게 부여된 직함이지 상설관직은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중국에 파견되는 사실들에게 부여된
태수직의 경우에는 허직에 불과했다. [ 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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