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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의 말로

소담이2 2007. 11. 7. 09:55

 

 홍국영

본관 풍산(豊山). 자 덕로(德老).

 

홍국영(洪國榮,1748~1781)은 정조의 즉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습니다.
아무리 영조가 세손(정조)을 신임했다고는 해도, 세손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노론 골수파들의 책동에 의해, 죽어나갔기 때문에, 벽파의 입장에서 볼 때, 세손의  즉위는 자신들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벽파는 세손의 즉위를 막아야할 입장이었고, 세손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습니다만, 벽파가 영조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세손이 영조에게 함부로 이들을  버리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죠. 그랬기 때문에, 영조가 세손을 신임했다고 해도,  세손의 자리는 불안한 자리였습니다.


 

홍국영은 이런 상황에서, 세손의 즉위를 반대하는 인물의 제거를 맡았습니다. 이로  인해, 홍국영은 세손의 굳건한 신임을 사게 되었죠. 홍국영은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을 탄핵하여 몰아내고, 세손의 즉위에 가장 큰 공을 세웠습니다.

 

정조의 즉위 직후에는 홍상간, 윤양로 등의 역모를 적발, 처단한 뒤, 정조의 경호까지  맡았습니다. 이렇게, 새 왕의 굳건한 신임을 바탕으로, 권력을 움켜쥐게 된 홍국영은,  이때부터 자만감에 빠지면서 갖은 횡포와 전횡을 일삼아, 정후겸 못지않다 해서  '대후겸(大厚謙)'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맘에 들지 않는다고, 양자로 삼으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이담에게 역모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1778년에는 중전 김씨에게 소생이 없자,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 보내면서,  권력을 더욱 움켜쥐었습니다. 하지만, 여동생이 1년만에 병사하자, 이번에는 왕이  새 후궁을 들이지 못하도록, 반대를 하고,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이담을 죽은 여동생의 양자로 삼으려 했죠.

1780년에 가서야, 중전 김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가산을 몰수당하고, 쫓겨났습니다.
 홍국영은 쫓겨날때까지, 도승지, 훈련대장, 이조참의, 대제학,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했습니다.

 

홍국영은 처음에는 새왕 정조를 도와 개혁을 주도했지만, 이내 권력의 단맛에 빠져,  갖은 횡포와 전횡을 저지름으로써, 결국 악인으로 기억되고 말았습니다.

 

최근엔 홍국영의 정권독단을 정조가 일부러 방치했다는 이론도 있습니다. 즉, 정권을 손에  쥔 홍국영이 반대 세력을 제거하게끔 유도하면서, 그동안 정조 자신은 힘을 키웠다는 것이죠.

 

이는 주도면밀했던 정조의 성격상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 입니다. 홍국영의 세도를 방치,  세간의 관심을모아놓은 뒤, 자신은 뒷편에서 힘을 키웠다는 것이죠. 이는 학술연구기관의   성격으로 출발한 규장각이 훗날 자신의 친위부대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데서 잘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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