맵시

내 어린날의 소묘

소담이2 2005. 10. 1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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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씨 겔러리를 보면서 ...

어설픈듯 하면서도 애써서 만들어 입은 옷들을 볼때마다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6.25 사변으로 경기도 강화로 피난을 갔다.
아버지의 자전거 뒤 짐깐 대나무 바구니 속에 나와 바로 밑의 동생이 타고서 150리 길을 이틀에 걸려서 타고 갔다. 밀집 모자를 쓰고 갔으나 햇빛에 그을려서 얼굴의 피부가 벗겨져 몇일을 세수도 못하고 아픈 기억이 난다.

그때가 국민학교[요즈음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이다 안국동 재동 국민학교 1학년 때 8월 이였다. 그때 동생은 진분홍꽃 무늬가 들어간 원피스를 입었고 나는 무슨색 옷을 입었는지 생각이 않난다. [원피스는 어머니의 솜씨로 어머니께서는 동경 양재 여학교에서 3년동안 유학을 하셨다.]

신문리에 있는 합일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을 하고 학교옆의 할아버지 댁에서 학교를 다녔다. 봄이면 뒷동산에서 산나물을 따기도 했다. 냉이,달래, 쑥, 씀바귀, 산미나리, 명아주, 질경이, 싱아, 무릇 등등 나물 이름들을 모두 잊어서 생각해 내려고 해도 모두 생각이 않난다. 다만 달맞이 꽃이랑 엉겅퀴, 애기똥풀, 산딸기는 생각이 난다.

지금의 기억으로는 어렸을 때에도 그림을 잘 그린것 같다.
방과후에 몇 사람씩 남아서 학교 동상 앞에서 건너편 교회의 모습을 그림으로 자주 그렸었고, 선생님의 지도로 정물화도 그린 생각이 난다.

언젠가 5학년때 전국 어린이 솜씨자랑 대회가 있었는데 우리 학교의 3명의 대표로 작품을 출품한 일이 있다. 옥양목 하얀 옷감에 서양 자수로 꽃바구니에 가득히 피어있는 꽃그림을 한달동안 수를 놓아서 손으로 가방을 만들어 출품 했다.

그때는 6.25 사변 후이고 폭격으로 어머니와 외갓집 식구들이 돌아가셔서 엄마도 없이 살때 였고, 친가 친척 분들이 모두 피난을 와서 작은 아버지와 사촌들이 함께 생활을 했고, 작은 아버지께서 양복점을 하셨기에 수놓는 법을 작은 아버지께 배웠다.

그때 인천 창영 국민학교에서 전시회를 했는데 강화에서 출품한 나의 가방이 2등에 입상이 되어서 우리학교 5학년 전체가 배를타고,  전시회 구경을 갔다. 창영 국민학교 전시회를 돌아 보는데
나의 작품은 잘보이는 코너에 보기 좋게 걸려 있었다.

상장에는 뛰어난 솜씨라는 글과 함께 하이얀 줄 노트가 2권이 부상으로 주어 졌다. 당시에는 누우런 노트만 쓰다가 하얗고 매끌 거리는 노트는 매우 촉감도 좋고 글씨도 아주 잘 쓰여져서 아끼고 아껴서 한권은 일기장으로 썼던 생각도 난다.

잘되는 떡잎은 어렸을 때부터 알아 본다고 나이도 어리고 솜씨도 서툴지만 옷을  만들어서 입고 사진을 찍을수 있다는 것은 분명 어딘가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의 일면이다. 지난번 강습때에도 중학교 1학년인 학생이 어려운 패턴을 그릴수 있는 능력이 많아서 속으로 놀라기도 했다. 처음에는 얼떨떨 하기는 하다 그러나 조금씩 배우고 기술을 알아 가는 과정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다.

솜씨 코너에 애교스럽고 아마츄어 같은 옷이지만 그들의 사진을 볼때마다 예전에 내가 만들었던 꽃바구니 가방이 생각나서 빙그레 웃음이 나기도 하고 그때 어떻게 힘든 수를 놓아서 상을 받았을까?  의문이 되기도 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국민학생이 정말로 수를 놓았는가? 누가 대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도 받았다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