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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생은 90부터. 소화 박정희 수채화 인생

소담이2 2012. 9. 2. 01:58

 

 

 

 

 

소화 박정희 수채화

 

 

 

 

 

 

 

 

 

 

 

 

 

 

 

감사와 기쁨의 노래 ‘박정희 수채화 展’

크리스천투데이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박정희 수채화 ‘봄의 노래’(진흥 아트홀 제공)

 

 

 

수채화가 박정희 장로는 자전적 수필집 <나의 수채화인생> 출판을 기념해 내달 1일부터 9일까지 진흥 아트홀에서 ‘박정희 수채화 展’을 개최한다.

‘감사와 기쁨의 노래’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일상의 모습과 풍경을 특별한 기교 없이 담백한 수채화로 그려낸 박 장로의 꾸밈 없는 미술의 세계를 보여 줄 예정이다.

 

 

http://www.google.co.kr/url?sa=t&source=web&cd=3&ved=0CDoQFjAC&url=http%3A%2F%2Ftvpot.daum.net%2Fv%2F17069717&ei=MkEGTvDnFe-imQWesNy3DQ&usg=AFQjCNHwzzwNer1BY1-z-lsUlPhqJi2zUg

 

 

 

 

 

 

 

 

 

 

 

 

 

 

 

 

 

 

박정희. 유명애 수채화 모녀전

 

노을 2010.03.06 20:43

 

 

 

 

인천의 인물 점자 창제자 이신  송암 박두성 선생 문화사업 기금 조성을 위한

                           따님이신 88세의 박정희 할머님과 손녀이신 유명애 선생님의 수채화 모녀전이

                           인천 종합문화 예술회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소녀 같으신 박정희 할머님

 

 

 

 

 

 

 

 

 

 

 

 

 

 

 

                                                하루도 손에서 붓을 놓치 않으시는 할미님의 작품

 

 

 

 

 

                                                  할머님은 언제나 작은 화구들을 가지고 다니시면서

                                                  시장바닥 아니면 전철안 어디서든지 현장에서 스케치 하신다.

 

 

 

 

 

 

 

 

 

 

 

 

 

 

 

                                                   유명애 선생님과같이...

 

 

 

 

 

                                                           유명애 선생님 작품

 

 

 

 

 

 

 

 

 

 

 

 

 

 

 

 

 

 

 

 

 

 

 

 

 

 

 

 

"인생은 90부터"... 꽃 수채화 사랑에 빠진 박정희 작가
[60년 지킴이] 인천 동구 화평동 평안수채화의 집을 가다
11.06.10 15:04 ㅣ최종 업데이트 11.06.10 15:04

 

  
인생은 90부터라며 환하게 미소 짓는 박정희 작가는 분명 청춘 그 자체다.
ⓒ 이정민
평안수채화의 집

재개발과 도시화의 물결로 인해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요즘, 인천 동구 골목길을 가면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도 냉면 거리로 유명한 화평동길 초입에 자리잡은 '평안수채화의 집'(화실)은 이 골목의 터줏대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지난 8일 오후3시께, 3층짜리 건물 외벽에 벽화 그리기가 한창 진행 중인 평안수채화의 집 현장으로 찾아갔다. 이 작업은 동구청이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펼치고 있는 사업으로 낡은 골목 외벽들을 선정해 지역 작가와 주민들의 손으로 화사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미술 작업 현장을 뒤로하고 마침 휴식시간을 맞아 함께 살고 있는 따님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층 안내데스크에 보이는 '투약구'라는 작은 글씨 간판이었다. '아, 이곳이 예전에 약국이었나, 아님 병원?' 혼자 짐짓 추측을 해보며 둘러보는데 옆에 있는 분이 말을 건넨다.

 

"아, 여기 글씨 보니까 기억이 나네요. 제가 이 동네 살았었는데 어릴 적 엄마 손잡고 치료하러 온 적 있는 것 같아요. 하하~. 맞아요. 이곳이 병원이었고 1층에서 약을 타갔던 것 같아요. 커서는 들어와 본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안을 구경해보니 이제 알겠네요."

 

말을 들어보니 정말 병원이었던 것 같은 분위기다. 그걸 증명이라도 해주듯 작품으로 둘러싸인 한쪽 귀퉁이에는 약을 타가려고 주민들이 기다렸던 작은 소파들이 오랜 향수를 머금고 자리하고 있었다.

 

건물 자체에서 풍기는 오래된 추억의 향기가 그대로 살아있는 집안 곳곳은 그야말로 역사 속 주택 내부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었다. 작은 계단, 낡은 페인트 흔적, 오래된 나무 창문, 작은 요강, 그리고 집 내부에 가득한 박정희 작가의 작품 갤러리까지.

 

마치 고향 할머니 집을 방문한 것처럼 구수하고 포근한 냄새가 가득했으며 가지런히 정렬된 할머니의 빛바랜 작품들은 이 집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운치를 더해주었다.

 

한국점자의 아버지 송암 박두성 선생의 뜻을 이어받다

 

 

 

 

 

 

 

  
박정희 작가는 현재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시각장애인 장학재단 송암장학회의 고문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은 오래된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한 맹인안내견 스티커
ⓒ 이정민
평안수채화의 집

짧은 집 구경을 마치고 이윽고 박정희 작가의 안방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사진첩을 열심히 뒤지느라 손님이 온지도 몰랐던 박 작가는 이내 환한 웃음을 보이며 반가이 맞아 주었다.

 

1923년생, 올해 나이 88세. 외관상으로 처음 뵈었을 때는 그 나이 또래의 노년의 중후함이 들어보였었지만 이내 말을 건네고 이야기가 회자되자 기자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순발력과 기억력에 한 번 놀랐고, 중간 중간 말을 곱씹으며 확인까지 해주는 센스에 두 번 놀랐으며, 인터뷰와 그림을 한 번에 끝마치는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박 작가는 실제로 인터뷰가 끝마침과 동시에 그림 하나를 완성시켰다).

 

박정희 작가는 평안수채화의 집 주인이자 시각장애인들의 대모, 그리고 육아일기의 저자로 그 명성이 아직까지 건재한 열혈 선생님이었다. 박 작가가 이렇게 살기까지 인생의 큰 화두를 던져 주었던 인물은 바로 그의 부친인 송암 박두성 선생이었다. 박두성 선생(1888∼1963)은 시각장애인의 정신적 지주, 한국점자의 아버지, 한국 맹인의 아버지라 불리며 평생을 맹인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다.

 

박두성 선생은 1913년 제생원 맹아부(현 서울맹학교) 교사를 거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1920년부터 한글점자 연구에 착수하여 7년간의 연구 끝에 마침내 1926년 '훈맹정음(訓盲正音)'이란 독창적인 한글점자를 창안해 내놓는다.

 

박두성 선생은 시각장애 교육이 장애인교육이나 자선사업에 그치지 않고 직업교육과 더불어 시각장애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 양성 및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조선어 교육이 폐지된 상황에서도 제생원에서는 우리글의 공교육이 지속될 수 있었다. 

 

"아버지 덕분에 92년 한국점자도서관건립기념 전시회와 97년 인천맹인복지회관 건립기금전, 2000년 안구기증협회 사랑 나눔 전시회 등을 하면서 시각장애인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게 익숙해졌지. 무슨 큰 의미가 있어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생활이 되니까 그렇게 하게 되더라고."

 

박 작가는 부친이 그렇게 유명한 일을 했음에도 굳이 그 의미 부여를 하고 싶지 않아했다. 마치 '뭘 그렇게 대단한 일을 했다고 이러나'라는 반문을 하듯 그에게 주어진, 그리고 그를 통해 인연이 된 모든 사람들에게 그저 나누어 주는 것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굳이 부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소탈하고 겸손한 박 작가의 성격이 보인다.

 

가난 속에 강해진 가족 간의 정 그리고 육아일기

 

  
할머니라는 칭호보다는 바람난 청춘이 더 어울린다는 박정희 작가의 모습이 아름답다
ⓒ 이정민
평안수채화의 집

"지금이야 육아일기가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지만, 1940년대에 다섯 남매의 육아 성장일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기 속의 그림과 글자 하나마다 삶의 기쁨과 환희와 소망, 그리고 한 가족의 작은 역사가 숨 쉬고 있는 다섯 권의 육아일기에는 진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고경옥 이랜드문화재단 큐레이터는 지난 2010년 10월께 있었던 꽃 수채화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는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삶의 긍정의 에너지를 주고 있다고 극찬했다.

 

박정희 작가는 송암 박두성 선생의 4남 1녀 중 차녀로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온 시부모와 같이 20명이 넘는 대가족을 돌보며 찢어지게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여기서 아픈 사람들은 그가 인터뷰 내내 애인이라고 칭했던 그의 남편이 의사였기 때문이다. 평안 수채화의 집은 그의 애인이 하늘나라로 간 후 먹고살기 위해 다시 간판을 내린 이름이었고, 1950년부터 2000년까지는 평안의원 건물로써 아픈 주민들과 오래도록 함께해준 소중한 병원이었다.

 

박 작가의 부친도 그러했지만 그의 애인(남편)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그 시절 의사라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평생을 부와 명예를 떨쳐버리고 오직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박 작가 또한 소학교 교사를 하면서 교육에 대한 남다른 철학을 갖게 되었고, 집안형편의 어려움 속에서도 다섯 남매를 훌륭히 키우며 가르쳤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삶의 내력을 당시 책으로 펴내 상당한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

 

결국 유유상종이라는 속담이 있듯, 그의 부친과 남편 그리고 박 작가를 포함한 모든 식구들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곁에서 현재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아픔과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 시절의 어려움들이 그의 가족을 더욱 강한 유대감으로 만든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꿈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사랑하고 결혼해라

 

 

 

  
박정희 할머니의 오래된 친구
ⓒ 이정민
평안수채화의 집

  
박정희 작가의 오래된 친구
ⓒ 이정민
평안수채화의 집

박 작가는 인터뷰 내내 화실에 모인 2명의 수강생들과 작은 화분 속에 담긴 꽃 한 송이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는 기자와 인터뷰를 여유 있게 이어가면서도 수강생들이 물어보면 척척 지도까지 해주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오~놀라워라'

 

독실한 크리스찬 가족으로 성장한 박 작가는 인터뷰 말미 '사랑과 결혼'에 대해 유독 강조했다. 박 작가는 노처녀, 노총각들이 늘어나고 있는 세상이 너무 안쓰럽고 안타깝다고 하면서 "꿈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야 가난해도 좋고, 부유해도 좋고, 행복한 법이여"라며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하며 결혼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선물이라고 강조했다.

 

"9년 연애한 커플 중에 여자 쪽이 내가 쓴 육아일기 책을 보더니 덜컹 '결혼하자'해서 남자가 총각신세를 면했다고 하더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아니여(웃음)? 자고로 결혼은 해도후회 안해도 후회라고 허지만, 바보같이 결혼을 안 하고 인생 끝난다는 것은 조물주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란 말이여. 만날 수박 그림만 그리고 그 수박은 먹지도 못하면 바보지, 암 바보고 말고. 맛있는 수박을 깨뜨려 먹을 때 비로소 그림이 완성돼는 고야. 기자총각도 그렇게 흔들흔들 날라리처럼 살지 말고, 내 말 명심혀. 하하~"

 

참 유쾌한 촌철살인이다. 웃음 만면한 유머러스한 말들이 어쩜 귀에 이리도 쏙쏙 박힐까. 천성이 명랑파라는 박 작가의 말마따나 그는 인터뷰 내내 '하하''호호'하면서 소녀 같은 웃음을 흠뻑 보내 주었다. 덩달아 침묵 속에 그림에 열중하던 주변 수강생 아줌마들도 모처럼 신나게 웃고 떠는 시간이었다.

 

 

 

  
박정희 작가가 직접 그린 평안수채화의 집 1층 정문 모습
ⓒ 이정민
평안수채화의 집

세상엔 웃을 일이 너무 많다는 박 작가, 하늘에 별만 봐도 좋아 죽고, 잡초 속에 피어난 꽃만 봐도 마음이 설렌다는 박정희 작가는 주말만 되면 수강생들과 함께 인천대공원엘 가서 바람난 청춘처럼 열정과 사랑을 자연 속에 쏟아 붓고 온다고 했다.

 

2005년 남편은 흙으로 돌아가면서 통장에 100만 원을 남겼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판을 내건 평안수채화의 집은 이제 동구 화평동 거리의 명물로 그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는 최근 그의 작품 100점을 팔아 현금 2000만 원을 어렵게 마련해 부친의 아호를 딴 송암장학회에 기부했다.

 

화가 초기 무렵, 종이 구하기가 어려운 시절 서울 오장동 인쇄소 골목 쓰레기를 모아 그림을 그렸던 그 때가 오히려 더욱 좋았다는 박 작가에게서 어려운 보릿고개를 이겨내고 고된 집안일을 돌보면서도 항상 사랑과 웃음을 보여주었던 어머니의 따스한 향기가 가슴에 전해져왔다.

 

자식들에게 직접 동화책을 지어 주면서 어느새 유명 작가 반열에 올랐다는 박 작가는 마지막 소망이 있다면 지금처럼 꽃 수채화를 그리며 삶을 마무리하는 것과 틈틈이 써 왔던 원고들을 모아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를 남겨주고 싶다고 전했다. 그러며 그는 '땅에 뿌리박은 삶'을 살아갔던 헬렌과 스콧니어링의 삶이 담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을 소개하며 인터뷰의 마무리를 장식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 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 2011 OhmyNews

 

 

 

 

소녀 같은 여든다섯 할머님, 사랑합니다
[배다리 골목길 이야기 18] 박정희 할머님 육아일기와 수채화

 

08.03.09 17:31 ㅣ최종 업데이트 08.03.09 17:31 최종규 (함께살기)

 

 

 

  
▲ 동네 마실 다닐 사람들 책으로 보고, 말로 들어도 나쁘지 않지만, 몸을 움직여서 우리 두 발로 땅을 디디며 맛보는 골목길 삶터는 사뭇 다르리라 느끼면서 '우리 동네 마실'을 합니다.
ⓒ 최종규
우리 동네 마실

 

 - 1 -

 

 동네 아저씨와 아주머니 몇 사람이 뚤레뚤레 모입니다. 우리가 뿌리내리고 살아오는 인천 배다리 한켠이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삶터 발자취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돌아보면 깜깜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름대로 우리가 아는 만큼이라도 서로 나누어 보자는 뜻에서 ‘우리 동네 마실’을 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2월 20일 낮, 올해 들어 두 번째 나들이를 합니다. 먼저, 배다리 헌책방골목에 자리하고 있는 〈시 다락방〉에서 언손과 언몸을 녹입니다.

 

신포시장에서 떡집을 하고 있는 이씨 아저씨가 동네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줍니다. 떡집 아저씨(떡집 사장님이라고 해야 좋아하지만, 그냥 아저씨라고 하고 싶습니다)는 이 골목이 예전에는 어떤 저잣거리였는가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동구청 자리가 60년대까지 짐승잡는 곳(도축장)이었다는 이야기, 일제강점기 때 소 한 마리 잡는 값이 얼마였는가 당신 부모님한테 들은 이야기를 잊지 않고 우리한테 건네줍니다.

 

그런 뒤 요사이 떡집 바쁜 일이 몰려서 당신 일터로 돌아가시고, 우리들은 영화여상 국어교사인 또다른 이씨 아저씨가 앞장서는 걸음에 맞추어 골목길을 걷습니다.

 

 걷는 길에 ‘인천시 정부가 밀어붙이려 하는 산업도로 예정터’ 옆을 지납니다. 과일집이지만 가게 앞에 온갖 꽃그릇을 잔뜩 내어놓고 있는 할머니 과일집 옆을 지납니다. 지금 같은 아스팔트 길이 나기 앞서는 조그마한 골목길이었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석축을 봅니다.

 

동구청 안으로 들어갑니다. 안쪽에는 ‘옛 도축장에서 죽은 짐승들 넋을 기리는 돌’이 조그맣게 서 있습니다. 기림돌 앞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눕니다. 동구청 옆 새로 지은 청사 건물을 보며 금곡동 안쪽을 걷습니다.

 

맨션 사이에 버티고 있는 옛 서민집 옆을 지납니다. 이 집 앞에는 크고작은 꽃그릇이 스물쯤 놓여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곧 봄인데, 봄날을 맞이하면 이 꽃그릇에 얼마나 싱그러움이 묻어날까 궁금합니다.

 

 

 

  
▲ 학교 옆 골목집 창문이 조금만 더 크면, 이 창문으로 해서 학교를 다닐 수도 있겠습니다.
ⓒ 최종규
동명초등학교

 

 동명초등학교로 들어갑니다. 초등학교 담벼락을 따라 골목집이 한 채 두 채 세 채 …… 잇달아 붙어 있습니다. 운동장 끄트머리 수도가 옆에 있는 집.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어? 담벼락이 없네. 담벼락 없이 그냥 골목집이 바싹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 지난날 이 골목집에 살던 아이는 이 학교로도 다녔을까?

 

 제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그때 학교 울타리를 따라 붙어 있던 집에 살던 아이는 도시락을 싸 오지 않았습니다. 낮밥 때가 되면 쪼르르 학교 울타리로 달려가 울타리 너머 자기 집 창문으로 어머니를 부르고, 따끈따끈한 밥을 냉큼 받아서 교실로 돌어와서 먹었습니다. 이리하여 이 녀석은 가방이 가볍지만, 이 녀석네는 하루 내내 시끄러움에 시달립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얼마나 시끄럽게 떠들며 노는가요. 조잘조잘 재잘재잘 왁자지껄.

 

 지난번 ‘우리 동네 마실’ 때에는 동명초등학교에서 나와 왼쪽 골목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오른쪽 골목길로 접어듭니다. 조금 걸으니 삼익아파트가 나옵니다. 이제 서른 해를 넘겼음직한 삼익아파트. 아파트 꽃밭 키큰나무 둥치에 ‘버려진 자전거’ 여섯 대가 쇠사슬로 묶여 있습니다. 녹슬고 먼지 소복히 앉고.

 

 

 

  
▲ 버려진 자전거 이 자전거들은 어찌하여 이렇게 버려질까요.
ⓒ 최종규
자전거

 

 조금 뒤 큰길. 건널목을 건너 송림동. 우리들은 오른쪽 골목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동구 청소년수련관 앞에 섭니다. 우리를 이끄는 선생님인 이씨 아저씨가 부지런히 지난날 자취 이야기를 들려주고, 성당 신부님을 비롯해서 당신들이 어릴 적 이 동네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뛰어놀거나 일하며 살았는가를 풀어놓습니다.

 

이제는 재개발과 재생사업에 쓸려서 곧 사라질 ‘송림시장’ 빈터를 봅니다. 빈 시장길 바깥쪽, 주택가 안쪽 골목에는 1950년대에 지어진 2층짜리 집이 죽 이어져 있습니다. 바깥벽을 벽돌로 차곡차곡 쌓은 옛집.

 

우리 옆지기는 이와 같은 인천 골목집을 보면서 ‘여기는 딴 세상 같다’는 말을 곧잘 합니다. ‘시간이 멈추어져 있는 곳 같다’고도 합니다. 드문드문 간판 바뀐 집이 있지만, 퍽 많은 곳은 50년대 자취가, 60년대 자취가, 또 70년대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동구 청소년수련관 앞에 교회 하나 있습니다. 이 교회는 해방 앞뒤로 한경직 목사가 북녘에서 내려와 인천에서 터를 잡으며 세운 교회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당신은 교회 일곱 곳을 세울 꿈을 꾸었는데, 제1교회와 제2교회와 제3교회까지는 세웠지만, 더 세우지 못하고 서울로 갔다고. 왜 ‘제1’과 ‘제2’ 교회라는 이름이 붙었는가 하는 궁금함이 풀립니다.

 

 이제는 더 극장 노릇을 안 하는 옛 현대극장 앞에 섭니다. 그래도 극장 간판은 그대로 있군요. 동인천역 뒤편 오성극장과 미림극장도 극장 노릇은 안 합니다만, 극장 간판은 아직 그대로 있어요. 이 둘레에서 머뭇머뭇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성당 신자 한 분이 신부님을 알아보더니 얼른 튀밥을 사 와서 신부님한테 안깁니다.

 

 

 

  
▲ 동부시장(현대시장) 인천 동부시장 한켠에 서 있는 50년대 첫머리 때 건물. 그때 이만한 건물을 짓자면 제법 돈이 들었을 테고, '있는' 집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하루빨리 쓸어내고 더 높은 상가 건물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할 테지만.
ⓒ 최종규
건축

 

 - 2 -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 오르며 우리 동네 이야기를 합니다. 달동네 박물관은 모두들 여러 차례 찾아왔기에 지나치기로 합니다. 언덕길 계단을 밟고 솔빛주공아파트 사이를 지나서 내려옵니다. 송현시장에 닿습니다. 떡집 아저씨를 다시 만납니다. 그 사이에 일을 마치고 나오셨습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

 

 떡집 아저씨는 “함세덕 선생 생가를 본 적 있나?” 하면서 우리들을 이끕니다. 함세덕. 누구지? 저로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일제강점기와 1950년 한국전쟁 때까지 나라안에 이름을 드날리던 극작가라고 합니다. 1950년에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참말 그때 죽었는지 또는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고 하는데 ….

 

동인천역 뒤편, 예전에 나룻배가 드나들던 다리 자취가 둘 남아 있는 곳에서 안쪽 골목으로 갑니다. 골목집으로 들어온 떡집 아저씨는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면서, “자, 조용히 들어가서 보라고” 하며 파란 쇠문을 살살 밉니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아직도 예전 기와집 자취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인천시에서 이곳이 함세덕 선생 생가인 줄 알면서 시 돈으로 사들여서 문화복원을 할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함세덕 선생 남은 식구가 남녘에 없기도 하다지만, 이 집은 지금 소주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집, 함세덕 선생 생가를 조용히 둘러보고 나서 골목길 한쪽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소주집 분, 또는 지금 이 집에 살고 있는 분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와서 기웃기웃 우리를 쳐다보고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 함세덕 선생 생가 '소주방' 간판이 있는 바로 옆 파란대문이 함세덕 선생 생가입니다. 지금은 소주집입니다.
ⓒ 최종규
함세덕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른바 ‘세수대야 냉면 거리’로 알려져 있는 화평동 골목길입니다. 지난날 이곳은 ‘냉면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인천시 정책에 따라서 냉면집 건너편에 있던 색시집은 모두 철거되었고, 몇 군데 냉면집이 새로 생기고, 시에서 적잖은 돈을 들여서 ‘냉면 거리 조형물’도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냉면 거리로? 떡집 아저씨는 어느 냉면집 주차장으로 들어가더니, “하하, 아직도 그때(옛날) 자취가 그대로 있네. 이것 좀 봐, 이 창문을” 하면서 주차장 울타리 안쪽에 가려져 있는 빨간 벽돌집을 가리킵니다.

 

빨간 벽돌집 옆으로 길게 걸개천이 걸려 있습니다. 뭔 걸개천일까 하며 들여다보니, '평안수채화의 집'이라는 글월과 수채화 몇 점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밑으로는, “http://ilovegrandmother.com”이라는 인터넷방 주소도 적혀 있군요. “내 사랑 할머니”? 뭔가?

 

 

  
▲ 평안수채화의 집 박정희 할머님이 꾸려가는 수채화 집. 이곳은 옛날에는 병원으로 쓰였습니다.
ⓒ 최종규
박정희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 그렇구나. 이 집이 그 집?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평안수채화의 집〉 주인장인 할머니 방에 찾아가 봅니다.

 

  
▲ 박정희 할머님 집 한글로 곱게 새겨진 이름패가 붙은 조그마한 골목집입니다.
ⓒ 최종규
박정희

.. 일제 강점기인 1923년, 한글점자 창안자 송암 박두성 선생의 둘째 딸로 태어난 박정희 할머니. 언제나 소녀처럼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박정희 할머니는 경성 여자사범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인천 제2송림보통학교 교사로 3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1944년 평양의전 출신 내ㆍ소아과 의사 유영호와 결혼, 평양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슬하에 4녀1남을 두었다. 1947년 삼팔선을 넘어 친정이 있는 인천 율목동에서 6ㆍ25를 겪었고 1ㆍ4후퇴 때는 남쪽으로 내려온 시댁 식구들과 함께 23명의 대식구를 모시고 살았다.

 

남편이 1949년 현재의 자리(인천시 화평동)에 평안의원을 개업했고  1952년∼63년 사이에 아이들을 보살피는 알뜰한 마음으로 육아일기를 집필 제작했다.

 

박정희 할머니는 20여 년 간 유치원 원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현재도 지난해 여든셋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한 남편과 함께 단출하게 살면서 그림 지도, 육아일기 강좌 등 바쁘고 즐거운 노년을 꾸미고 있다.

 

한국수채화 협회 공모전에 수차 입ㆍ특선을 할 정도로 다채로운 화가 경력을 갖고 있는 박정희 할머니는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비롯해 현역 수채화가인 큰딸 명애와 수채화 모녀전을 갖기도 했으며 현재도 붓을 놓지 않고 있다. 박정희 할머니는 지난 1997년 장애인의 날에 맹인들을 도운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바도 있다 ..  (박정희 할머님 해적이)

 

 아이고야. 저도 코앞은 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화평동은 국민학교 적부터 요사이까지 뻔질나게 지나가던 골목 가운데 하나인데, 그동안 이곳, 〈평안수채화의 집〉은 한 번도 못 보았으니까요. 더욱이, 박정희 할머님 이야기를 1998년에 처음 듣고서 열 해가 넘도록, 할머님 집이 이렇게 찾기 쉬운 골목 한켠에 있음을 여태 몰랐습니다.

 

  
▲ 여든다섯 할머님 여든다섯 나이에도 야무지게 살아가시는 박정희 할머님은, 당신 살던 옛집을 손수 추슬러서 고운 전시관으로 꾸미려고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최종규
박정희

 

 우리들은 〈평안수채화의 집〉 왼편으로 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이 골목 안쪽에는 박정희 할머님이 지난 긴 세월 동안 ‘스물셋이나 되는 큰식구’가 옹기종기 모여살던 조그마한 집(참말 작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 스물셋이나 살았다니)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할머님은 말합니다.

 

“시에서 재개발 재개발 하는데, 난 이 집 못 팔아. 이 집을 어떻게 팔아?”

“할머니, 이 집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내가 고쳐서 이 집에다가 전시관을 꾸며야지.”

 

 생각해 보면, 박정희 할머님이 꾸며야 할 ‘전시관’은 여럿입니다. 먼저 당신 아버님이 일제강점기 서슬퍼런 때에 꿋꿋하게 ‘한글 점글’을 만들어 낸 자국을 되짚으며 되살려 놓는 일. 다음으로 할머님 당신이 수채화를 그려 온 삶. 그리고, 아이들을 돌보고 키우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를 그러모은 육아일기. 여기에, 할머님 당신과 당신 식구들이 여태껏 살아오면서 남겼던 온갖 물건들을 그러모으는 ‘생활문화역사’ 이야기들.

 

 - 3 -

 

 박정희 할머님은 당신 일터인 〈평안수채화의 집〉으로 우리들을 데리고 들어갑니다. 수채화 집은 지난날 당신 지아비가 병원을 꾸려가던 자리. 이제는 병원은 안 하고 터만 남았습니다. 할머님은 이 터를 깨끗하게 간수하면서 어느 것 하나 함부로 건드리거나 다치지 않습니다. 예전 모습이 하나하나 살아 있습니다.

 

문가 ‘샷다’부터, 안쪽 ‘불을 다룰 때는 자리를 지킵시다’라는 경보단추 푯말까지. 나들간 신발장에는 옛날 꼬맹이들이 붙여놓았음직한 판박이가 여태 고이 붙어 있습니다. 문지방 둘레에는 할머님이 그린 수채화를 자르고 코팅하여 붙였네요.

 

  
▲ 옛 병원, 지금은 수채화 집 지난날에는 병원이었던 이곳이, 이제는 수채화 집으로 새숨을 이어받았습니다.
ⓒ 최종규
박정희

 

 옛 진료실 자리로 들어가니 두 분이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창 조용히 그림을 그리는데 난데없이 한 떼거지 손님이라니! 죄송합니다. ‘곧 갈 때가 되어서 간다’고 합니다만, 우리들 때문에 좀더 느긋하게 그림을 즐기지 못하셨습니다.

 

 할머님이 지내는 방에 예닐곱 사람이 옹크리고 앉습니다. 할머님은 당신 예전 자취를 하나씩 꺼내어 보여주면서, “그런 기록들을 어떻게 없애?” 하고 말씀합니다.

 

“난 지금부터 할 게 많아서 일찍 죽을 수 없어 … 집이 ‘넓어서’ 안 버리고 있었지… 이걸 누가 귀중한 줄 알아. 다 버리지… 기록을 다 하려면 죽을 때까지 바쁠 거잖아… (당신 어머님 옛 사진을 보여주면서)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늙어갔어. 그 (긴)머리를 다 집어치우고(잘라버리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서….”

 

할머님은 문득 손가방 하나를 들더니, “난 이거 버리지 못해. 내가 만들어도 내가 감탄해.” 하고 말합니다. 이거 하랴 저거 하랴 바쁜 가운데에도 당신이 쓸 손가방을 ‘남는 천쪼가리 모아서’ 꿰매어 가방 하나 만들었다면서.

 

  
▲ 천장 무늬 손수 꾸며 놓으신 할머님 방 천장 무늬.
ⓒ 최종규
박정희

 

 “폭격이 그렇게 쏟아졌어도 살아남았잖아? 그러니 오늘은 폭격이 없네 하면서 (일기를) 썼지. (그렇게 해서 여태껏 살아남았으니) 빚 진 게 많아서 (일찍 죽을 수 없어)… 도적놈이 들어와서 이 집 좀 (옛날에 잘) 살았구나 살펴보아도 돈은 없어… 꺼져가는 늙은이한테 ….”

 

할머님은 당신 옛이야기를 하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힙니다. 옆에서 듣는 사람 눈에도 빙그르르 눈물이 맺힙니다.

 

 그러는 동안 옆지기가 저를 부르더니 ‘저 달력 그림 좀 보라’고 합니다. 그림이 좀 이상하지 않으냐고 해서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봅니다. 음, 그러네요. 달력에 붙은 그림이 ‘달력 그림이 아닙’니다. 할머님이 손수 그린 수채화를 달력에 새겨진 그림 자리에 턱 하고 붙였습니다.

 

옆지기가 천장도 보라고 손으로 가리킵니다. 아, 천장도 여느 천장이 아닙니다. 할머님이 온갖 빛깔 종이를 고루 붙였습니다. “내가 이거(코팅기)까지 사 놓고 손수 다 한다고” 하면서, 당신이 받은 편지, 당신이 살아오며 당신 손을 거쳤던 종이 들을 코팅으로 하나하나 해 놓았다고 합니다.

 

  
▲ 할머님 달력 할머님이 그린 수채화 한 점을 아무 미련 없이 철썩 붙여놓은 달력.
ⓒ 최종규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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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수채화의 집〉에서 나옵니다. 너무 오래 할머님을 붙잡고 있을 수 없습니다. 동인천 먹자골목으로 가서 밥집 한 군데로 들어갑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습니다. 그러고는 헤어져서 모두 자기 길로 갑니다. 우리도 우리 길을 걸으며 집으로 갑니다. 어둠이 내린 골목을 걸어 집에 닿습니다. 잠깐 도서관에 들어가서 책 두 권을 뽑아듭니다. 하나는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한국방송출판,2001), 하나는 《나의 수채화 인생》(미다스북스,2005).

 

 옆지기한테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를 건넵니다. 저는 《나의 수채화 인생》을 펼칩니다. 세 해 앞서 한 번 읽었지만 다시 한 번 읽을 생각입니다. 세 해 앞서는 박정희 할머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한 가운데 읽은 책이었지만, 이번에 다시 읽을 책은 할머님 삶과 집과 일터와 눈물을 함께 부대끼고 나서 읽을 책입니다.

 

  
▲ 할머님 손 여든다섯 해를 쉼없이 달려온 당신 손. "한국전쟁 폭격 때 용하게 살아남았음은, 당신이 죽어 사라진 이보다 더 많은 일을 하라는 빚"으로 여기면서 여태껏 몸과 마음 튼튼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 최종규
박정희

 

  
▲ 문간 판박이와 스티커는... 문간 위쪽에 붙어 있는 판박이와 스티커는 누가누가 붙였을까요. 오랜 세월 고이고이 살아가는 할머님 벗입니다.
ⓒ 최종규
박정희

 

  
▲ 할머님 이야기 할머님 이야기는 그칠 줄 모릅니다. 당신 삶을, 당신 눈물을, 또 당신 웃음을 우리한테 한 올 한 올 물려주면서 우리한테 '살아갈 희망'이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 최종규
박정희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d.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골목길+책+헌책방+우리 말 이야기 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 2011 OhmyNews

 

 

 

 

 

 

 

골목길 나들이 - 화평동 박정희 할머니댁    나비, 배다리사람들 / 나비 날다

2010/05/24 16:27

 

 http://blog.naver.com/kesimeme/80108051270

 

 

 

 

 

 

화평동 냉면골목 입구에 '수채화의 집' 이란 오래된 집이 있다.

수채화 할머니라고 불리는 박정희 할머니댁이다.

배다리에 있으면서 종종 박정희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었다.

한글 점자 창안자 박두성 선생님의 둘째 딸이시며, 남편이 운영하던

병원자리에서 수채화를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책과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만 만나 뵙던 할머니를

최종규님이 이끄는 환경 기사단 친구들과 화평동 골목길 마실 나온 길에 찾아 뵙게 되었다.

 

 

 

 

이야기 손님이 찾아오거나 그림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맞이 하는 할머니의 화실,

처음 할머니를 뵈었을때 '타샤투더' 할머니를 만난 듯하였다.

꽃을 좋아하고, 인형을 좋아하고, 그림을 그리고, 정원을 가꾸는.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 이름 하나 하나를 기억하시고,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지금 할머니의 나이는 89세이시다.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을 돌보지 않아 어느덧 바보가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아이에게서 다시 글을 배우고, 아이는 어머니에게 알려 주려고

더 열심으로 공부하고...... '

 

 

 

중학교, 고등학생인 아이들, 할머니의 이야기에 감탄도 하고,

놀라워하며, 아프다고 잔투정 부리던 친구도 할머니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고......

'일제시대때 일본글을 배웠지만, 정신은 절대 빼앗기지 않았다'는 할머니 말씀과

지금은 자녀들과 위.아래층에 살면서 행복하시다고.

할머니의 행복지수는 100%,

지금의 삶에 무척` 만족하며 행복하시단다.

 

 

 

 

스승의 날에 제자들에게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할머니가 되어 인형 선물을 받은 사람은 할머니 밖에 없을거라고 좋아하셨다.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에 선물 받은 꽃들,

너무나 많은 꽃 선물에 가슴 벅차 하셨다는 할머니,

꽃을 워낙 좋아하시는 할머니는 선물 받은 꽃들을

모두 그림 그리셨다고 한다.

"원도 없이, 한도 없이"

 

 

 

 

 

할머니가 행복해 하시며 그린 그림들,

화실이 꽃그림으로 활짝 피었다. 저절로 기분 좋아지는 공간이다.

 

 

 

방안 천장에는 알록달록 색종이로 붙이셨다고 한다.

 

 

 

 

문밖까지 배웅 나오신 할머니,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내일이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니

...

걱정할 것 없다고 하신다.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덩실 덩실` 노래와 춤까지 추시며 배웅을 해주셨다.

 

하루 하루를 행복하게 사시는 할머니,

아름다운 할머니를 뵙게 되어 참 감사한 하루였다.

 

할머니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나는 이 세상에 보고 느끼는 것이 모두 아름답고 과분할 만큼 행복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관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노년이 되었기에 가능했을 지도 모르겠다"

 

- 박정희 할머니의 '나의 수채화 인생'에서 -

 

 

 

 

 

 

 

할머니의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를 듣고 싶거든 먼저 책으로 만나 보세요.^^;

 

 

 

 

 

 

 

 

 

 

 

 

 

 

 

 

 

 

 

 

 

 

 

 

 

 

 

 

 

 

 

 

출처 : 미룸
글쓴이 : 궁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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