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명화
[스크랩] 위험한 관계 vs 스캔들
소담이2
2006. 4. 27. 04:08
지난 주말에 이재용 감독의 한국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를 보았는데, 이 영화와 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스티븐 프리어즈 Stephen Frears 감독의 영/미 합작 영화 "위험한 관계 Dangerous Liaisons (1988)"와 비교해서 조금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두 영화의 구체적인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으니, 아직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글을 읽지 마시고, 아래쪽에 두 영화의 이미지들을 비교해 놓은 것만 보세요.
이미
아시겠지만 "스캔들"은 18세기 프랑스의 작가 라클로 Choderlos de Laclos 의 소설 "위험한 관계 (1782)"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소설은 혁명 전의 프랑스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죠. 사치와 향락이 극에 달하면서 생기는 공허감을 메르퇴유 후작부인
Marquise de Merteuil 은 계략을 세워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쾌감으로 메우고, 발몽 자작 Vicomte de
Valmont 은 여인들을 유혹하여 정복하는 쾌감으로 메웁니다. 이들은 발몽이 정숙한 투르벨 부인 Madame de Tourvel 을 유혹할 수
있는가를 두고 내기를 벌이죠. 영화 "스캔들"은 배경을 18세기 말 조선 사대부 사회로 바꾸어 메르퇴유, 발몽, 투르벨 대신 조씨 부인, 조원,
숙부인을 등장시킵니다.
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은 이밖에도 많답니다. 비교적 오래된 영화로는 로제 바댕이 감독하고 명배우 잔느 모로가 메르퇴유 부인으로 출연한 프랑스 영화 "위험한 관계 (1959)"가 있어요. 최근의 영화로는 로저 컴블 감독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원제: 잔인한 의도) Cruel Intentions (1999)"이 있는데, TV 시리즈 "뱀파이어 해결사 버피 Buffy the Vampire Slayer"로 유명한 새러 미셸 겔러가 메르퇴유 후작부인에 해당하는 캐서린으로 나온답니다. 이 두 영화는 모두 배경을 현대로 바꾸었다는데,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제가 인상적으로 본 프리어즈의 "위험한 관계"는 원작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을 그대로 따라서 로코코 시대의 프랑스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프라고나르 Jean Honore Fragonard (1732-1806) 의 "그네 (1767)" 그림이 그려진 배경과 비슷하죠. 이 그림은 언뜻 보면 화사하고 발랄하기만 한 것 같지만 잘 보면 신발을 가볍게 차 던지는 그네 위의 여성과 그녀의 치마 속을 바라보고 있는 아래쪽의 남성에게서 미묘한 긴장감과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 느껴집니다. "위험한 관계"의 분위기가 바로 이렇지요.
이 영화는 배경뿐만 아니라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의 성격 묘사에 있어서 다른 영화들보다 원작 소설에 가깝다고 합니다. 한편, 이 영화는 배역이 아주 화려하죠. 메르퇴유 후작부인 역에 글렌 클로즈, 발몽 자작 역에 존 말코비치, 투르벨 부인 역에 미셸 파이퍼, 그리고 당시 신인이었던 키애누 리브스와 우마 서먼이 각각 당스니 기사 Chevalier Danceny 와 세실 드 볼랑쥬 Cécile de Volanges 로 출연해 아직 앳된 모습을 보여주지요.
프리어즈의 "위험한 관계"와 이재용의 "스캔들"은 여러 모로 흥미로운 비교 대상입니다. 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 외에도, 두 영화 모두 지나간 한 시대의 의상과 소품, 인테리어를 정교하게 묘사해서 당시의 사회상을 표현하고 인물들의 성격, 심리를 상징하는 동시에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위험한 관계"가 프라고나르 같은 프랑스 로코코 시대 풍속화가들의 그림을 많이 참고했다면 "스캔들" 역시 신윤복申潤福 (1758~?) 같은 조선 후기 풍속화가들의 그림을 많이 참조했을 것입니다.
옆의 신윤복의 "단오도端午圖"에서 그네 뛰는 여인의 모습을 프라고나르의 "그네"와 비교해 보세요. 원색에 가까운 강렬한 색조와 단순화된 선의 멋들어진 흐름을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와 섬세한 세부 묘사와 비교해 보세요. 두 그림의 전혀 다른 매력은 아래 사진들에서 볼 수 있듯이 "위험한 관계"와 "스캔들"의 서로 다른 영상미로 이어지지요.
내용과 분위기 면에서는 "위험한 관계"가 냉정하고 절제되어 있는 데 반해 "스캔들"은 더 서정적인 것 같습니다. 또 "위험한 관계"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복잡하고 모호하게 나타나는 반면에 "스캔들"에서는 좀더 단순하고 분명하게 나타나죠.
발몽과 조원 모두 유혹의 표적에 불과했던 투르벨 부인 또는 숙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또 처음에는 바람둥이로서의 자존심에서 자신의 그런 진지한 감정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점이 일치하지만, 조원의 경우 죽음을 맞기 전에 일찌감치 자신의 감정을 결론짓고 숙부인에게 서화를 전달하는 것과 달리, 발몽은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끝없이 갈등합니다.
숙부인의 경우에는, 조원의 진심을 알고 난 후 그의 죽음을 전해 듣고 저세상에서 그와 결합하고자 얼음 강으로 빠져들어가 자결합니다. 하얀 얼음 강과 조원이 선물했던 숙부인의 붉은 목도리의 대조가 인상적이지요. 반면에 투르벨 부인은 발몽에게서 받은 충격으로 인한 병으로 이미 빈사 상태에 이르러 있을 때 발몽의 죽음과 그의 진심에 대한 말을 전해 듣게 되고, 얼마 안 가 눈을 반쯤 뜬 채로 숨을 거둡니다. 미묘하게 싸늘한 충격을 주는 투르벨 부인의 투명한 눈은 텅빈 것 같기도 하고 너무나 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조씨 부인의 경우, 그간의 행실이 폭로된 후 가문의 징벌을 피해 배를 타고 떠나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조원이 주었던 들꽃 말린 것을 펴 보지요. 이것은 조씨 부인이 첫사랑이었던 조원에 대해 여전히 순수하고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질투와 복수는 이런 감정이 왜곡되어 표출된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말린 꽃이 날리는 이 장면은 특히 서정적이죠.
반면에 메르퇴유 후작부인은 발몽을 사랑해서 그와 투르벨 부인의 사랑을 질투한 것인지, 자신이 겪지 못한 것이기에 진지한 사랑의 체험을 질투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여주지 않은 것에 분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복합적인지도 모르죠. 그간의 악행이 폭로된 후 오페라에서 야유를 받고 돌아온 그녀가 천천히 화장을 지우는 마지막 장면은 참 인상적인데, 그녀의 모호한 표정이 그 인상을 한층 더 강렬하게 합니다.
그러니 어느 결말이 더 마음에 드세요? 위와 같은 점들 때문에 저의 직장 선배는 "스캔들"이 더 좋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저는 위와 같은 점들 때문에 "위험한 관계"가 더 좋답니다... ^^ 그러나 의상은 "스캔들"이 더 마음에 드는군요. 특히 조씨 부인이 입었던 풍부한 노란색의 치마와 그에 걸맞는 밀화 장신구는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o^
출처 : Moon의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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