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담이2 2006. 1. 25. 07:28

 

 

여성 시인으로 서정 詩를 썼던 노천명의 아름다운 시는 마음을 한껏 고향으로 달려 가게 한다. 어느 시인이 근래의 시인을 평가 할때 왜 아무개 시인은 빠뜨렸습니까 했다. 그랬더니 시는 나므랄때가 없지만 시류에 예속이 많아서 평가를 할수 없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이 살기 위하여서는 어쩔수 없이 예속의 삶을 영위해 왔으나 인간 아무개로 보지 말고 시인 아무개로 보아 주는 일도 필요 하다고 생각 한다.


고향

노천명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 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 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뻐국새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 곰방대
곰취 참두릅 훗잎나물을
뜯는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망이 은방망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기를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에서 온 반마[班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아얗게 피는 곳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순 꺾다 나면 꿈이 였다.

노천명 [ 1912 ~ 1957 ] 황해도 출생, 영세명 베로니카.

 

 

● 묘 소 : 1970년 서울 중곡동 카톨릭 묘지에서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대자1리 소재
         카톨릭 묘역으로 이장, 입구에서 3Km 이상을 들어간
         산 끝자락 중턱에 위치하며 흰 화강암 석재로 다듬어 놓았고
          묘지 앞 중앙에 시비가 세워 짐,
         (노천명의 묘와 나란히 한 오른 쪽은 언니 노기용의 묘임).

● 詩 碑 :
         * 1957. 8. 20. "고 시인 노천명 문인장위원회"가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대자1리 카톨릭 묘역에 <고별>8, 9연을
         서예인 김충현의 글씨로 높이 60cm, 넓이 98cm의 화강석에 새겨
         묘비를 겸하여 세움.

         * 부산 어린이대공원(일명 "성지곡수원지")내의 10리 거리에 떨어져 있는
          "시가 있는 숲" 삼림욕장 입구 왼편의 "체력단련의 숲"에 위치한곳에
          <사슴>을 새긴 시비가 있음.

● 저 서

        시집 :
            <珊瑚林>, 1938년.
            <窓邊>, 1945년.
            <별을 쳐다보며>, 1953년.
            <사슴의 노래(유시집)>, 1958. 6. 한림사.
            <노천명전집>, 1960. 천명사.
            <노천명시집>, 1972. 서문당.
            <노천명전집·1 (사슴)>, 1997. 7. 31. 솔출판사.

        수필집 :
            <산딸기>, 1948. 10.
            <나의 生活白書>, 1954. 7.
            <사슴과의 고독의 대화>, 1973. 4. 서문당.
            <노천명전집·2 (나비)>, 1997. 7. 31. 솔출판사.

        기타 :
            <여성서간문독본>, 1955. 12. 박문출판사.
            <이화70년사>, 1956. 5. 이화여대출판부.

 

 

1934년 이화여전 졸업. 재학중(1932) 신동아에 "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 모윤숙과 함께 당시로서는 몇 안되는 여류 시인의 한 사람이었고 점차 명시인으로 부각받게 된다.

그의 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자기 중심적인 정서 특히 고독에 대한 심도있는 표현. 둘째, 시인 자신의 농촌 생활로부터 그려낸 향토적인 정경의 객관적 묘사. 셋째, 역사적 국가적 인식의 반영이 바로 그것이다.

"사슴", "자화상"같은 그의 대다수 걸작에서 자유분방한 정서의 면모를 첫번 째 특징의 본보기로 종종 접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창조성은 고독이나 슬픔의 단순한 표현에 머무르지 않고 그러한 감정 표현을 통하여 더욱 더 심오한 자신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우수적인 시인은 실존론적 뿐만 아니라 본체론적 의미도 묘사하였다.

농촌생활에서 나온 그의 시는 주목할만 하다. 전통 문화와 민속에서 알권낸 이러한 작품은 대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 시절의 향수를 결합하고 있다. 오랫동안 중학교 교과서에 게재된 "장날"은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이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어려웠던 농촌 시절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나이 또래 한국인들은 대부분 전원 생활을 겪었기에 그가 그려내는 세계는 친숙할 뿐만 아니라 공감하기에도 쉽다. 지금도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향수는 널리 호감을 사고 있다.

세번째 특징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는 판이하지만 일제 말 그의 활동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면이다. 그는 친일 신문인 매일신보 기자로 일하였다. 또 공식적인 일본 대표단 자격으로 일본군 점령하에 있던 중국 동북지방을 여행하였다. 더우기 일본의 점령을 찬양하고 적극적인 지지를 표방하는 수많은 친일 시를 출간하였다. 해방 이후 매국노로 낙인찍혔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에 머무르던 그는 조선문학예술동맹에 참여하였다. 후에 체포되어 이적죄로 20년 형을 선고 받았으나 여러 시인들의 노력으로 6개월 후 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험은 그의 생애와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후기 작품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국가적 인식은 이러한 경험과 밀접히 관련된 것이고 다소 인위적인 경향이 보인다. 이러한 시는 그가 생존해 있을 때 발표되었고 이전의 작품과는 상당한 거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일본에 협조하게 된 경위와 감옥 생활을 시로 썼다. 또 공산주의자와 함께 이적죄로 체포되었고 옥중 생활을 하였으므로 반공, 애국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memo  


황해도 장연(長淵)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화여전 재학 때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 졸업 후에는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자를 지냈고,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친일적 작품들을 남겼다. 8 ·15광복 후에는 《서울신문》 《부녀신문》에 근무하였다. 6 ·25전쟁 때는 미처 피난하지 못하여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讚美)》 《포구(浦口)의 밤》 등을 발표하였고, 그 후 《눈 오는 밤》 《사슴처럼》 《망향(望鄕)》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湖林)》을 출간하였다. 1945년 2월에 제2시집 《창변(窓邊)》을 출간하였는데, 여기에는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에는 부역 혐의로 수감되었을 때의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하여 ‘사슴의 시인’으로 애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