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원수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

소담이2 2005. 11. 17. 11:54

                                                         

 

 

 

                                                  안중근의사 유묵-국가안위 노심초사

 

 


1909년 10월 26일 아침 7시 안중근의사는 양복에 검은 외투를 걸치고 캡모자를 쓰고 이토 히로부미의 환영 인파속에 섞여들었다. 외투 주머니에는 브로우닝 8연발 권총을 숨긴 채 하얼빈역으로 나갔다.

(하얼빈:중국 북동부 헤이룽장성[黑龍江省(흑룡강성)]의 성도)

안중근은 꿈에도 잊지못할 우리나라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을 없애기위해 동지들과 피를 나누며 하느님께 몇번이고 자신의 희생을 다짐했다.

우리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한 뒤 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나라에 이어 만주 침략을 꾀하기 위해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호체프와 만나고자 하얼빈으로 오는 길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전승국 일본의 기세는 등등하여 하얼빈 거주민들의 환영인파는 그 규모가 대단했다. 검은 복장의 의장대가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철옹성처럼 행렬과 환영인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안중근은 특별열차로 도착한 히로부미가 각국 사절들과 인사를 마치고 의장대 사열을 향해 서는 순간 히로부미의 심장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3발의 총탄은 히로부미의 가슴과 배에 명중하였다.
히로부미가 쓰러지자 안중근은 "대한민국 만세"를 여러번 외치고는 체포되었다.
안의사는 온 겨레의 소원을 이룬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가슴에 십자가를 그었다.

열차 안으로 옮겨진 히로부미는 브랜디를 마셨다. 피가 흐르는 가운데 "누가 쏘았는가" 하고 묻자 "한국인이 쏘았습니다" 라는 누군가의 대답을 듣고 죽어갔다.
그나마 단추 하나가 탄환 1발을 막아 짧은 시간이나마 살아있을 수 있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여순감옥에서 스러진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에 입은 옷은 그의 어머니와 부인이 며칠밤을 새어 눈물로 지은 명주 한복이었다.
저고리는 흰색, 바지는 검정색으로 명주풀솜이 정성들여 받혀진 수의 아닌 수의였다.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의 광복을 위해 피를 흘린 수많은 순국열사중에 대한민국의 기백과 자주독립정신을 만방에 보여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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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유묵 - "국가안위 노심초사"에 대한 설명>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만주의 여순(旅順) 감옥에서 쓴 행서 글씨 두 폭이다. 그 가운데 한 폭은 오른쪽 위에 "증안강검찰관(贈安岡檢察官)"이라 쓰여 있듯이 안중근 의사가 이곳에 있을 때 자신의 취조(取調)를 담당했던 여순검찰청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靜四郞) 검찰관에게 써준 것이다.

야스오카는 사망하기 직전 이 유묵을 큰딸 우에노(上野俊子)에게 물려주었고, 그 뒤 동경 국제한국연구원(國際韓國硏究院)의 최서면(崔書勉) 원장을 통하여 1976년 2월 11일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되었다.

선지(宣紙)에 모두 여덟 글자를 한 줄에 썼는데, 내용은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國家安危 勞心焦思)"라는 뜻이다.
말미에 "경술년 3월 여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이라 낙관하고 왼쪽 손바닥으로 장인(掌印)을 찍었다.

이 글은 각각 자신을 취조한 검찰관과 경호를 담당한 헌병에게 써준 것으로 일본인조차 안 의사의 충절과 의리에 감복하여 소중히 간직해왔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사진 및 설명 출처 : 서울문화재 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