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청궁 관람기
건청궁 관람기
2007년 10월 24일 오후 2시정각 건청궁의 관람이 시작 되었다. [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 함 ]
궁궐 해설사의 안내로 건청궁이 지어진 내력부터 각 전각 이름의 내용까지 상세하게 들을수 있었다.
1873년 즈음에 건립한 건청궁은 설계도면 등이 남은 게 없기 때문에 건청궁을 촬영한 사진과 경복궁을 그린 북궐도 등 각종 문헌을 참조해 복원했다고 한다. [ 일본에서 찾아온 주춧돌의 크기로 건축됨 ]
고종10년(1873)은 경복궁 중건이 마무리된 해에 고종은 경복궁 가장 깊숙한 곳에 건청궁을 짓기 시작했다.
워낙 궁궐 깊숙한 곳에 짓다보니 공사 초기에는 누구도 건청궁 창건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를 알게 된 신하들이 연이은 궁궐 건축으로 백성의 부담이 크다고 상소가 빗발쳤으나
고종은 "내탕금(왕의 사비)으로 짓는 것"이라며 공사를 강행했다.
고종의 건청궁 창건은 정치적 자립 선언으로 1873년은 고종이 친정을 선언한 해이기도 하다.
10년 동안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받은 고종이 아버지의 간섭을 피하는 동시에 정치적 독립을 꾀하기 위해
경복궁 북쪽 깊숙한 곳에 독립된 건물을 지은 것이다.
고종은 1884년부터 건청궁에서 기거하면서 근대화를 위한 실험을 진행했다.
1887년 건청궁에는 조선 최초의 전기등이 들어섰다. 중국이나 일본의 궁성 설비보다 2년 앞선 일이고,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지 8년만에 설치한 750개의 전등이 궁궐을 환하게 밝힌것이다.
1887년 3월 6일 건청궁에 에디슨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한 전등불을 당시 어느 상궁은 궁궐 사람들이 전등을 구경하기 위해 갖가지 핑계를 대서 건청궁에 들어왔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전기 기술은 썩 좋지 않아서 불도 자주 꺼지고 비용도 많이 들어갔다. 때문에 사람들은 전등불을 ‘건달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873년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가 을미왜변 직전에는
고종과 명성황후 거처로 사용한 건청궁은 을미왜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해 1909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헐려 사라졌으며, 대신 그 자리에는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어서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 철거됐다.
건청궁은 처음 지었을 당시 252칸이었으나 복원된 건청궁은 관문각 일대의 60칸을 제외한 192칸 296평이다.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건축형식을 지녔으며, 왕의 거처인 장안당(長安堂), 왕비 거처인 곤녕합(坤寧閤), 그리고 부속건물인 복수당(福綏堂)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오랫동안 평안하다'는 뜻의 장안당은 27칸, 측면 3칸, 7량(집)의 건물로 상류주택 양식에서도 가장 격조가 높은 건물로 전한다.
장안당에는 북행각과 동행각이 딸려 있는데 북행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해 한국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곳으로도 기록돼 있다.
곤녕합의 곤녕(坤寧)은 '땅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왕비의 덕성을 표현한 말이다.
곤녕합의 남쪽 누각에는 옥호루(玉壺樓)라는 현판이 붙어있는데 명성황후가 시해 [ 1895년 10월 8일 새벽 6시 ( 묘시 ) ]된 장소이며 시신이 잠시 안치된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해설사의 안내로 여러 건물들을 둘러본 후에 장안당 내부를 일일이 들어가서 둘러볼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장안당의 명성황후 시해 장소인 옥호루 [옥으로 만든 호리병 이라는뜻 ]전각을 올라가 보고 마음이 찡한
느낌을 받았다.
옥호루의 다른쪽 문에는 사시향루 [ 사방으로 좋은 향기가 퍼지라는 뜻 ] 현판이 붙어 있다.
정시향 [ 왕비의 침방 ]과 정화당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곤녕합 뒤쪽에는 수라간이 있었다.
장안당의 추수부용루라는 전각은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수 있는 루마루이다.
1885년 10월 8일, 일본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도 건청궁에서 발생했다.
최근 발굴된 당시 경성 주재 일본 일등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작성한 보고서에 당시 곤녕합에 있던 명성황후는 일본인들에 의해 장안당 뒤뜰로 끌려간 뒤 여기서 시해된후 시신은 곤녕합에 부속된 누(樓)인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됐지만, 일본인들은 건청궁 동편에 있는 언덕인 녹산(鹿山)에서 황후의 시신을 불태워버렸다. [ 가슴아픈 역사의 현장 인 경화문 앞 녹산도 둘러 보았다 ]
이후 1896년 2월,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 경복궁 건청궁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시호 : 명성황후 (明成皇后, 1851~1895)
소개 : 조선 고종의 비. 성은 민씨(閔氏). 본관은 여흥(驪興). 경기도 여주 출생.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이다.
가문 : 조선의 노론의 전통 명문가인 여흥민씨 가문으로,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 민씨,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와 같은 집안이다.
사망 : 1895년(고종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도한 을미사변때에
일본 정치깡패에 의해 시해됨.
[사회부 2급 정보] ○…1895년 명성황후시해 장소에 있던 러시아인의 목격기가 공개됐다.
당시 궁궐 건축기사였던 세르진 사바틴은 “황후전 마당에서 약 15분간 서 있으면서 일본인들이 10∼12명의 궁녀들을 창문밖으로 내던지는 것을 봤다”고 썼다.
명지대 LG 연암문고는 11일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세계문학연구소 김려춘(77) 교수가 러시아 제국외교
고문서관에서 사바틴의 목격기를 발견한 뒤 직접 번역해 보내왔다”며 목격기 번역본을 공개했다.
사바틴은 목격기에서 “10월8일 새벽 5시쯤 일본 군인들이 궁궐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300여명의 무리가 나를 건청궁(명성황후가 머무르던 궁)의 옥호루 마당으로 끌고갔다”고 적었다. 그는 이어 “마당에서 머물러 있을 때 양복을 잘 차려입은 한 일본인이 오른손에 단검을 들고 궁녀들을 창문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있던 다른 일본인들에게 큰 소리로 명령했다”고 썼다. 사바틴은 “궁녀들 중 한 사람도 신음소리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고도 했다.
사바틴은 또 “일본인들이 황후가 어디에 있는지를 내게 물었으나 ‘조선의 관습과 법에 따라 유럽인 남자는 황후를 볼 수 없다’고 변명해 위기를 넘겼다”고 적었다.
사바틴은 이와함께 “명성황후 시해 시간인 오전 6시 직전에 궁궐에서 빠져나왔다”고 적었다. 따라서 시해 장면을 직접목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공개된 ‘웨베르 보고서’(당시 주한 러시아 대리공사였던 카를 이바노비치 웨베르가 사건 경위를 적어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는 “일본인들이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갔으며 얼마 뒤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는 사바틴의 증언이 포함돼 있어 ‘목격기’와 ‘보고서’ 사이 진위 논란이 일 전망이다.
http://www.royalpalace.go.kr/html/guide/guide21.jsp?dep1=1&dep2=2&seq=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