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천상열차분야지도

소담이2 2007. 10. 14. 12:19

 

천상열차분야지도

  그러면 日月은 어떻게 運行하는 것인가? 하는 것부터 硏究해보기로 하겠다.

   天道에는 黃道와 赤道가 있다. 赤道라는 것은 天腰의 中半點이니 그 北쪽을 外廓이라 하고 그 南쪽을 內廓이라고 한다. 北極이란 것은 外廓의 極盡處인 것이요, 南極이란 것은 內廓의 極盡處인 것이다.

   그런데 黃道란 것은 地球가 太陽의 周圍를 도는 길(道)인데 이 黃道는 赤道의 北쪽으로 二十四度, 赤道의 南쪽으로 二十四度까지 나갈 수 있는 것이고 그 밖으로 더 나가기는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春分後에는 赤道의 北쪽을 向하여 二十四度까지 나갈 수 있고 秋分後에는 赤道의 南쪽으로 二十四度까지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地球의 軸이 二十四度 以上 傾斜지는 法이 없기 때문이다.(現在는 二十三度 七分 傾斜져 있음)

   단 여기에서 黃道에 對해서 한마디 附言하여 둘 것은 「視黃道說」이다. 우리가 實地로 볼 때 地球가 太陽의 周圍를 돌고 있는 것이 事實이다. 그러나 그것은 前에 말한 바와 같이 地球 運行의 本體面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作用面 즉 現象面에서 보면 恒常 太陽이 地球의 周圍를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日月이 地球에 光線을 던져 줌으로써 일어나는 모든 現象에서 變化를 把握하는데 便利하게 하기 爲해서는 一旦 太陽이 地球의 周圍를 돌고 있는 것으로 假定해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今日의 曆象學은 이것을 太陽이 地球의 周圍를 도는 것처럼 假定하고 그것에 「視黃道」라는 槪念을 設定한 것이다. 그런즉 여기 結論에서 筆者가 地球의 運行하는 길이 黃道라고 썼지만 原典에는 日行(즉 太陽이 간다)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以下 모든 說明은 視黃道에 依하여 說明할 것인즉 미리 여기서 讀者 諸位의 諒解를 바라는 바이다.

   그러면 다음은 달(月)의 運行에 대해 말하기로 하겠다.

   달(月)이 運行하는 길은 九個가 있으니 黃道 黑道 赤道(太陽이 運行하는 경우에 말하는 赤道와는 다른 것이다) 白道 靑道로서 區分되는데 그 중 黃道만 一個이고 다른 四道는 各各 두 개씩 있으므로 合하여 九道가 되는 것이다.

   九道 가운데 오직 黃道만은 一道로서 中央에 位하고 其他 八道는 黃道를 中心으로한 東西南北에 그들이 運行하는 길(道)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黑道는 黃道의 北에 있고 赤道는 黃道의 南에 있고 白道는 黃道의 西에 있고 靑道는 黃道의 東에 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宇宙間의 變化現象을 나타내는 九宮八風의 原理는 이와 같이 달이 運行하는 軌道에서 그 起原이 생겼던 것이다.(九宮八風原理는 各論에서 詳論할 것임)...

황제내경강의(2) 중에서...
그림출처 한국천문학사연구회

 

 

淳祐天文圖

  中國 蘇州의 孔子廟 안에 있는 世界 最古의 石刻天文圖로서 南宋 淳祐丁未(1247년)에 刻石된 것이다.
  石刻을 만든 사람은 王致遠이고, 模刻의 原圖는 王致遠이 四川(蜀)에서 얻은 것으로 兼山 黃公이 光宗初年에 그린 것이다.
  黃裳이 근거한 것은 元豊年間(1076∼1085年)의 觀測에 의한 것이다.

그림출처 한국천문학사연구회

 

 

출처 : 선경2007
글쓴이 : 두만강 원글보기
메모 :
 천 상 열 차 분 야 지 도
 성립과 구성
 
조선 초기의 천문학은 서운관의 설치와, 태조 4년(1395) 12월에 완성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제작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는 모두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왕조의 운명을 내다보기 위해 천문관측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거기서 얻은 관측결과가 천문도를 제작하는데 쓰여진 것이다. 태조는 건국과 동시에 왕조의 정통성을 위해 새 왕조가 하늘의 뜻에 의해 세워진 것임을 천명하기 위하여 천문도의 제작을 서둘렀다.
그 결과  즉위한지 4년 만인 1395년에
『천상열차분야지도』
를 완성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권근 등 11명의 학자와 천문학자의 노력이 깃들어진 것이다.

이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하늘의 적도를 12분야로 나누어 차례로 늘어 놓은 그림이란 뜻이다. 이 천문도는 가로 122.8cm, 세로 200.9cm의 흑요석에 세겨졌다. 권근이 지은 글을 설경수가 썼다. 추산은 유방택이 했다.

권근의 글은 그의 저서 『양촌집(陽村集)』천둔도시(天文圖詩)에서도 확인된다. 이 때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경복궁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그대로 방치되어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다. 영조 46년(1770)에 영조는 그것을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서 관상감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숙종 때에 새로 새긴 『천상열차분야지도』와 함께 설치하게 했다.
권근은 이 천문도 제작의 의의를 이렇게 썼다.
 
 
옛부터 제왕이 하늘을 받드는 정치는 역상(曆象)과 수시(授時)를 으뜸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요임금은 사시(四時)의 절후를 바로잡게 했고, 순임금은 선기옥형으로 칠정(七政)을 관측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권장함에 있어서 시기를 늦추지 아니한 것이다. ···(중략)···먼저 중성을 바로 잡은 것은 즉 요·순의 정치를 본받은 것이지만, 요순이 천상을 관찰하고 기계를 만든 본 마음을 추구해 보면 그 근본은 다만 하늘을 공경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도 역시 공경함을 마음에 두어, 위로는 천시(天時)를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의 일에 힘쓰면, 그 신공(神功)이 성대하게 빛나서 마땅히 요·순과 같이 융성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 성도(星圖)를 정민(貞珉)에 새겨서 영원히 자손만대의 보배로 삼으려 하니, 참으로 위대하다.
(권근 『양촌집(陽村集)』권 22, 천무도시(天文圖詩))

천문도를 대략 2등분한 선에 접해서 직경 76cm의 원을 그려 성도(星圖)를 그렸다. 원의 중심에 북극이 있고 북극을 중심으로 하여 관측지의 출지도(出地度)에 따른 작은 원과, 더 큰 적도 및 황도권이 그려져 있다.
1464개의 별이 그려져 있는 별자리 그림의 원의 둘레에는
28수(宿)의 이름
과 적도수도(赤道宿度)(각각의 28수가 적도 상(上)에서 차지하는 도수)기록되어 있고, 각 수의 거성(距星)(각 수(宿)에서 한 개의 별을 골라서 그 수의 표준별로 정하여 거성(距星)이라 하였다.)과 북극을 연결하는 선에 의하여 개개의 별의 입수도(入宿度)가 목산(目算)으로도 정확하게 읽어 나갈 수 있게 그려져 있다.
관측기사에는 24절기의 중성(中星)(
혼(昏)·효(曉)(황혼과 새벽)에 자오선을 지나는 별)에 대한 천상(天象)기사) 12국분야, 및 28수의 성수(星數), 일수(日宿)(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일수(日宿)'라는 제목으로 태양의 궤도에 관하여 간단히 적어 놓은 것이 있다. 여기에서는 적도와 황도의 경사가 24도다 되는 것을 지적하였고, 음과 양의 교체에 따라서 추위와 더위가 생긴다는 것을 말하였다. 태양을 임금에 비유하였고, 임금과 백성과의 관계를 설명하였다.)와 월수(月宿)(달의 궤도 운행을 말한다. 월수란 달이 천구상 매일 거쳐 가는 곳, 천구상의 운행하는 길을 말한다. 월의 운행궤도를 황도를 중심으로 9도로 나누었다. 즉 황도의 동쪽으로 가는 것을 청도(靑道)로 하였고, 남,서,북쪽으로 가는 것을 각각 적도(赤道), 백도(白道), 흑도(黑道)라 하였고 황도 안과 밖의 둘을 합하여 9도(九道)라고 하였다.
)의 기사 등이 쓰여 있다.

천문도의 중간 아래쪽에는 이 천문도의 이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란 제자가 새겨졌다.
그 아래에
논천설
즉 『진서』천문지를 인용하여 혼천설과 개천설을 주로 한 중국의 전통적 우주설을 기술했다. 그리고 28수 거극분도(去極分道)(과거 동양천문에서는 천체의 적위(赤緯) 대신 거극도 또는 거극분도란 말을 썼다. 적위와 거극도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천체의 적위) + (그 천체의 거극도) = 90°), 천문도 제작 경위, 태조를 찬양하는 천문도 제작의 의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관직과 성명, 제작 연월일을 기록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태조 때의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각석에는 그 뒷면에 마모가 심한 또 하나의 천문도가 그려져 있다. 그것이 미완성의 각석인지, 아니면 원래의 것인지 분명치 않다.
『증보문헌비고』권 2, 상위고에 의하면, 세종 15년(1433)에도 새 천문도가 돌에 새겨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심하게 마모된 쪽이 태조 때의 것이고 비교적 온전한 쪽이 세종 때에 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관측연대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1464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3세기초에 만들어진 『삼가성도』의 283좌 1464성과 일치한다. 그런데 진탁(陳卓)은 『삼가성도』에 의해서 310년에 처음으로 천문도를 만들었다고 이순지(조선초기의 천문학자 천문유초·제가역상집등의 저자)는 『제가역상집』에 쓰고 있다.
그래서 이 천문도의 바탕이 된 고구려의 천문도는 4세기 후반까지는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설(圖說)에 쓰여 있는 춘·추분점의 위치를 가지고 세차를 보정하여 3세기경으로 관측연대를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한 연구 결과는 그 연대를 B.C. 1세기 ∼ A.D. 1세기로 계산하기도 했다.( 박명순,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대한 고찰』서울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2) 대체로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들을 종합하여 볼 때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바탕이 된 고구려 천문도의 성립시기는 4세기 후반에서 6세기초 사이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는 『고구려연구』5집(고구려 연구회, 1998.6
'고구려 고분벽화의 북극성 별자리에 관한 연구' 김일권
)를 참조해 보면 좋을 듯.)

태조 때의 천문학자들은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해서 28수의 거극도나 적도수도는 고구려의 원본의 것을 그대로 옮겨 도설(圖說)에 썼으나 별자리 그림의 별들의 위치는 석각할 때의 시대에 맞게 바로 잡아 다시 그렸다.
『증보문헌비고』권2, 상위고2에, "을해년(태조4년 : 1395년) 여름 6월에 『신법중성기』가 완성되었는데, 그 24기의 저녁과 아침의 중성이 옛 천문도에 비하여 점차 차이가 났다. 그래서 성상(星象)은 옛 그림에 따르고, 중성은 『신법중성기』에 따라 돌에 새겼다." 라고 쓴 것은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그후 조선 천문도의 주류를 이루는 표준 모델과도 같이 이어졌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또 하나 숙종 때의 석각본이 있다. 이 석각본은 태조 때의 것이 몇 차례의 전란으로 인하여 보존이 잘 안되어 마멸되고 흐려져서 다시 새긴 것이다. 이것은 '天象列次分野之圖'라는 제자를 별자리 그림의 위로 옮겨 새기고, 천문도 도설의 구성을 보다 균형 있게 배치하였을 뿐, 그 내용은 태조 때의 것과 같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선조 4년(1571) 11월에 천문도 120폭을 만들어 문신 2품 이상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그것은 분명히 목판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인본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최근에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숙종 때의 석각본과 똑같은 것이다. 태종 때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선조 때에 목판에 옮겨 새기면서 숙종 때의 석각본과 같이 재구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선조 4년(1571)에 목판본으로 인쇄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숙종 때에 돌에 새겨져 새로운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이 되었다. 이 천문도의 각석은 돌의 크기는 조금 작아졌지만, 별자리 그림의 크기나 도설과 논천 기사 등이 차지하는 공간의 크기가 거의 태조 때의 것과 같다. 이 천문도 각석은 창덕궁 밖의 관상감의 작은 각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영조 46년(1770)에 영조의 명에 의하여 새로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경복궁에 있는 옛 천문도 각석을 옮겨 나란히 보존하였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18세기초에 서양 천문도가 조선에 도입되기까지 조선 천문도의 표준이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일본에도 전해져 에도시대 일본 천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涉川春海가 1670년에 만든 『天象列次圖』와 1677년에 만든 『天文分野之圖』는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바탕으로 해서 그려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천문도는 그 당시 일본 천문도의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려말 조선초의 천문학자들이 중국의 옛 전통적 우주관의 영향하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권근이 쓴 논천(論天)기사는 그것을 잘 요약하고 있다. 이 논천기사를 보면 고려말 조선초의 천문학자들은 중국의
혼천설을 그들의 우주설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근은 그의 논천설을 『진서(晋書)』천문지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혼천설은 조선 학자들의 우주관으로 오랫동안 그들의 천문사상의 바탕이 된 것이다.
 ※ 참조·인용 :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 전상운 저
세종학연구 :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분석 - 이은성 참조/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