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명詩

카네이션

소담이2 2007. 5. 10. 04:19

 

 

 

 어버이날 받은 꽃입니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詩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외할머니의 숟가락 / 손택수


외갓집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숟가락부터 우선 쥐여주고 본다

집에 사람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

사람이 없을 때도, 집을 찾아온 이는 누구나

밥부터 먼저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게

고집 센 외할머니의 신조다

외할머니는 그래서 대문을 잠글 때 아직도 숟가락을 쓰는가

자물쇠 대신 숟가락을 꽂고 마실을 가는가

들은 바는 없지만, 그 지엄하신 신조대로라면

변변찮은 살림살이에도 집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그릇의 따순 공기밥이어야 한다

그것도 꾹꾹 눌러 퍼담은 고봉밥이어야 한다

빈털터리가 되어 십년 만에 찾은 외갓집

상보처럼 덮여 있는 양철대문 앞에 서니

시장기부터 먼저 몰려온다 나도

먼길 오시느라 얼마나 출출하겠는가

마실간 주인 대신 집이

쥐여주는 숟가락을 들고 문을 딴다.

 

 

꽃단추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시집 『나무의 수사학』 중에서